부실 경지정리 부담 농민에게 떠 넘겨
부실 경지정리 부담 농민에게 떠 넘겨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7.10.30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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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현대사 Ⅱ]③경지정리 보상 사건

▲ 최성호 씨가 문제가 됐던 구만리 일대 경지정리 지역을 가리키며 당시의 일을 설명해주고 있다. 수확 철을 맞아 콤바인 기계가 바쁘게 움직이며 벼 베기에 한창이다.
행정기관·업자, 부정부패로 한 통속
농민희생 위에 세워진 근대화 업적
    

일제강점기 때 필요에 의해 소수 필지가 규격화된 적은 있었지만 근대적 의미의 경지정리는 1964년부터 시작된다. 경지정리는 농업의 기계화·용배수 관리의 원활화 등을 위해 시행한 토지개량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의 대부분을 농민이 부담하던 것을 1970년 ‘농촌근대화촉진법(이하 농근법)’이 제정 공포되고 난 뒤부터 사업비의 50%를 국고보조로 지원하게 된다. 

경지정리사업 중 가장 말썽이 많았던 일은 무엇보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온 농토를 교환분합(交換分合)하는 과정에서 공정한 환지(換地)업무를 추진하는 것이었다. 전남지역 내에서는 구례군 광의면과 광산군 본량면·삼도면 지역에서 경지정리 보상을 둘러싼 농민들의 대규모 반발이 있었다.  

모 심으려고 보니 자갈밭

76년 11월 시공사인 ‘금강기업’은 다음해인 4월 말까지 구례군 광의면 구만리 일대에 경지정리 작업을 시행한다. 자연 답을 바둑판처럼 만들어 보기에는 좋았으나 문제는 모를 심을 수 없을 정도로 자갈밭으로 변해버린 것. 논을 고르는 과정에서 시방서에 제시된 대로 30cm이상 복토를 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급하게 모내기를 하려던 농민들로서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새터·도암·분토·신도부락 90여 농가들은 모내기를 미루고 최성호(64.광의면우리밀영농조합법인 대표. 전 전남도 의원)씨를 중심으로 ‘경지정리 보상요구위원회’를 결성하고 시공사에 보상을 요구한다. 당시 최 씨는 보상대상은 아니었으나 인척 간인 권광식(조선대 교수) 가농전남연합회 회장의 권유로 구만리 가농 분회장을 맡고 있던 터라 앞장을 서게 된다. 보상요구액은 농민들이 자갈을 걷어내는 인건비조로 670여만 원 상당이 책정됐다.

그러나 시공사와 행정기관을 상대로 보상을 받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시공사는 설계대로 작업했을 뿐이라며 알 바 아니라는 태도를 보였고 시방서를 보여 달라는 농민들의 요구도 묵살했다.

그러자 가농 전남연합회 관계자(서경원, 노금노 등)들이 가세해 35명으로 꾸려진 보상위원들과 공감소(공사감독기관)를 항의방문하고 농림부와 도지사에게 진정서를 내는 등 각지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탄원활동에 들어간다.

경지정리를 위해서는 농근법에 따라 몽리농민(몽리(蒙利)란 수리혜택을 보는 범위 내라는 의미) 또는 대의원 2/3이상의 동의가 있어야 하나 지주들로 구성된 대의원들도 시방서 내용을 농민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다. 경찰은 경찰대로 주동자에 대한 신원파악과 “빨갱이 짓을 하려 한다”며 겁을 주었다.

최 씨는 “가농 구만리분회 회원이 27명이나 될 정도로 사회 부조리에 대한 농민들의 의식이 깨어있었고 모를 제 때 심지 못한 농가들의 분노가 응집돼 집단적인 대처가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시공사와 시행청은 농민들과 조정을 거쳐 47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하게 된다.

모범사례로 전국에 소개

시방서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농민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행정정보공개청구’로 시방서 내용을 확인하고 복토를 하지 않아 문제를 일으킨 시공사를 상대로 1년여에 걸친 끈질긴 투쟁 끝에 얻어낸 값진 승리였다.

구만리의 경지정리 보상운동은 이후 전국으로 퍼져나가 비슷한 사례로 속앓이를 하던 다른 지역에 하나의 모범으로 소개된다. 최 씨는 이후 경지정리 분쟁지역을 순회하며  성공사례 발표자로 유명세를 타게 되고 80년 대 중반에는 가농 전남연합회장으로 농민운동을 주도한다. 

78년 상반기 구만리 대촌, 유산 부락에서 또 다시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경지정리 후 논갈이가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한 황토 흙과 자갈이 뒤범벅돼 말썽이 인 것. 그러나 77년 같은 지역 내에서 있었던 승리의 경험은 이들에게 좋은 교과서가 된다. 최종수(작고), 이종열(작고), 유근성(이상 대촌부락), 박우갑(유산 부락) 등이 중심이 돼 관계기관과의 보상싸움에서 다시 1년여 만에 270여만 원의 보상금을 받아낸다.

이 과정에서 가농 대촌분회, 유산분회가 결성되고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벌어지는 수세 현물납부 운동 등 구례지역의 활발한 농민운동의 전기를 마련한다.  

노금노 당시 가농전남연합회 이사는 “경지정리로 불거진 말썽에서 보상금을 받아 낸 전국 최초의 사건이었다”며 “시행청(정부·군청)과 시공업자의 유착, 부정부패의 고리를 척결한 일대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사진 왼쪽으로 흐르는 하천이 77년 경지정리 과정에서 넓혀진 지방2급 하천 평림천. 제방 길 너머 오른쪽이 벼 베기를 끝낸 삼도면 일대 농경지. 하천과 제방을 넓히는 과정에서 기존 논 면적의 1/10이 국가 소유로 바뀌었다.
본량·삼도는 감보율이 말썽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광산군 본량면·삼도면의 사례는 조금 다른 경우다.

경지정리를 할 때 보통 3~5%의 감보율(논 면적이 줄어드는 비율)이 평균적이었으나 이 지역은 무려 11.36%의 감보율이 발생했다. 사행천(蛇行川. 구불구불 흘러가는 하천)을 직강하천으로 넓히고 경운기가 다닐 수 있도록 농로를 개설하면서 논의 면적이 1/10이상 줄어든  것. 그렇다고 정부나 시공사에서 농민들에게 감보면적만큼을 보상해 준 것도 아니었다. 사유지였던 논이 하루아침에 국가소유의 하천과 도로로 뒤바뀐 경우였다.

77년 봄 모내기를 마친 농민들은 과도한 감보율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정부나 영산강개발사업소가 해야 한다며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가농 본량분회장이던 조송길(69.광산구 어룡동)씨를 중심으로 본량면 북산리와 명도리 북성·황산·가마부락, 삼도면 송산리 시내동·가삼동 일부 지역 270여 농가가 보상요구에 동참했다. 요구한 보상금만도 2억5천여만 원에 달했다.

이들은 ‘들어라 이 농민의 억울한 호소를’이란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어 전남도청을 항의방문하고 광산 신동천주교회 등지에서 농성을 벌였다.

조 씨는 “당시 도청과 영산강개발사업소는 감보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급급했다”며 “사정은 딱하나 보상  근거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농민들은 정부가 농민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으로 하천을 넓히는 비용으로 충당했거나 중간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짐작했으나 이에 대해 책임있는 답변을 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삼도면사무소에서 있었던 공청회에서 행정기관 관계자는 “하천이 범람하면 농경지 침수가 우려돼 하천을 확장한 것이므로 감보율이 다소 많더라도 농민들이 감수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갖다 붙였다.  

보다 못해 조 씨의 친형인 조비오 신부가 나서 당시 고건 도지사와 면담을 주선하는 등 중재를 위해 노력했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관련법 바꾸면서까지 보상 외면

농민들은 보상을 못해주겠으면 해당 지역에 왕골돗자리 가공공장을 세워 주민들이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차선책을 제시했고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당시 농가들은 부업으로 왕골을 재배해 가내수공업 형태로 돗자리를 짜 오던 중이라 대규모 가공공장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정부는 오히려 농근법에 따른 경지정리와 병행해 하천공사법에 의해 하천을 넓히는 경우 감보율을 적용할 수 있도록 78년 관련법을 개정하면서까지 이들에 대한 보상을 외면했다. 

조 씨는 “다른 지역에도 유사한 피해사례가 많았던 때라 보상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고 그랬던 것 같다”며 “전남도와 영산강개발사업소가 손잡고 농민들 땅을 빼앗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당시의 억울했던 심경을 밝혔다.

농민들의 반발은 그 이후로도 2년 반 동안 계속됐으나 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반공법 위반 사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준비위) 사건 등 정치국면이 폭압적인 양상으로 바뀌고 농민들의 참여도 줄어들면서 보상요구는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나마 80년 초반 고건 씨에 이어 취임한 장형태 전남지사가 위로금 조로 1천만 원을 주겠노라고 제의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곧바로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면서 이후에는 아예 말도 꺼낼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조 씨는 “지금 같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 때는 농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며 “군사정권의 근대화 정책은 어디까지나 농민들의 철저한 희생을 바탕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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