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바보가 또 하나 있었네
아름다운 바보가 또 하나 있었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7.06.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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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글]성찬성

외길 밖에 모르는 사람, 많은 사람에게 고민을 안겨주었지. 그러나 그 사람이 길잡이였다네.

74년 3월이었지. 일명 민청학련 사건으로 광주경찰서에서 그를 처음 보았어. 아주 따뜻했네. 서로가 힘든 시간이었지. 하지만 자기 생각보다 남을 걱정하는 모습이 고마웠지. 그 후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눈에는 확실한 투사가 그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더라고. 그래도 무지몽매한 나는 대충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네. 그런데 우리는 불안할 뿐 조용히 지내는데, 이 친구는 맨날 끌려 다니는 거야. 80년 5월이 오기까지 세 번이나. 그러니 미안하고 맥 빠지고 그랬지 뭐.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는 날이면 오히려 더 팔팔한 거야. 마치 싸울 상대를 제대로 만났다는 듯이. 

사람이 반하여 눈에 콩깍지가 씌우는지 모르지만 가끔은 사람에게 아!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있는데, 나에게는 그이가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어. 그렇게 현대문화연구소니 개인의 역할분담이니 떠들며 세월이 흘러갔지만,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지.

당시에 조선대의 김운기를 빼고는 전부가 전남대 학생 열여덟 명이 머리만 승했지 부모의 돈을 받아 사는 것은 그래도 행복한 편일 정도였어. 내 기억으로는 좀 여유가 있었던 친구가 아버지가 의사였던 고영하와 윤광옥 김정길 정도였고. 거기에서 경제사관입문입네 뭐네 우리끼리는 꽤 심각했었던 거야. 

그때 내가 듣는 바로는 대통령상을 눈앞에 둔 농대 4학년 모든 학점 올 A였던 이 친구가 제안하는 것이 농대  잔디밭 풀 뽑기였어. 솔직히 ‘그래도 명색이 대학생인데’ 라는 개념은 그이에게는 통하지 않았어. 그래서 하루 종일 풀을 뽑고 받은 돈이 내 기억으로는 만 원도 되지 않았지. 그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나는 몰라. 문제는 그 다음 전남대학 봄 축제가 열렸을 때, 나는 약간 주눅이 들여 있었건만, 이번에는 아이스케키를 팔아 활동자금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다네. 정말 한심스러웠어. 그러나 어쩌랴, 팔기는 팔았는데 진짜 맥은 빠졌고. 아무튼 그것저것 모아 소위 ‘현대문화연구소’라는 물건이 만들어졌고, 내 기억으로는 역할 분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어느 분야에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세월로 이어졌지.

그리고 80년이 왔어. 나는 내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처음 직장이랍시고 서울로 와야 했어. 지금 말하면 정의구현사제단의 간사 직책이었다네. 오태순 신부 방에서 유인물을 만드는 일이 전부였는데 정말 맥 빠졌어. 그래도 한 달 월급 10만원이 어딘가. 그때는 생명줄이었지. 그리고 그이를 다시 만났어. 그이가 죽은(나는 돌아가신이라고 쓰고 싶다) 이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인연이 거기에서 맺어졌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었어. 싸울 때와 피할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지. 가장 먼저 들른 집이 지금 바티칸 대사로 있는 성염 집이었네. 오늘도 그 죽음을 안타까워할 만큼 아름다운 인연을 만들었어. 그리고 다음이 홍모 여인 집이었네. 그분은 홍대 미술과를 나와 홀로 살고 있다가 이런 인연으로 우리를 일깨워준 분이라네. 뒤에 시경 경무관을 사랑한 끝에 결혼하는데, 우리 이 인물을 숨겨준 죄로, 남편이 제주도 도경국장을 하는 동안 안기부에 끌려가 의도적으로 접근한 여자로 엄청 고생을 했어. 그리고 그래도 오래 있는 곳으로 어찌어찌 해서 윤정모 집에 자리를 잡았고 거기에서 밀항이 이루어졌고. 정말 여러 사람이 고생고생했지. 그때 있는 힘껏. 나도 차라리 도청에 있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이는 그 뒤 꽤 긴 세월이 지나 김영삼 정권 시절에 귀국을 하게 되었지.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 가장 먼저 그 동안 살아온 내 모습이 그의 눈에는 완전히 가위표였다네. 자신을 사랑했던 뭇 인간들, 그들에게 도전을 시작한 거야. 솔직히 말해서 내가 존중하지 않았다면, 아니면 내 형제였다면 모르는 체 하고 싶을 정도였어. “너 왜 살아야” 이런 말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지.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가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그의 희생성 때문이었던 거 같아. 모든 조건이 그를 받들어 삶을 엮어갈 때 일판이 벌어질 것 같았어. 그는 그렇지 않았네. 자신을 도와준 그들부터 현재의 삶을 확인하기 시작했었지.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떳떳하게 살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네. 새판잡이였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사실 나는 이 글로 돌아가신 그이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싶었다네. 그런데 그게 잘 되지 않는군. 스물거리는 곤충 한 마리도 사람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납득하겠는가? 그래도 없으면 허전하고 있으면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그 사람을 잃은 마음이 굉장히 허전하다. 잃는다는 것이 이런 뜻인가 보다


<이 글은 성찬성님이 윤한봉님의 부음을 듣고 시민의소리에 보낸 추모의 글입니다.>

성찬성님은 70년대 ‘페다고지-민중교육론’ 등을 번역하는 등 수십권의 번역서를 냈으며 70년대 이후 8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에 헌신했고, 지금은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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