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산 증인’ 역사 속으로
광주민중항쟁 ‘산 증인’ 역사 속으로
  • 김경대 기자
  • 승인 2007.06.29 16: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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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윤한봉 씨 빈소, 추모 발길 이어져


▲ '5.18 마지막 수배자' 故 윤한봉 전 민족미래연구소장의 분향소가 마련된 조선대병원 빈소에는 고인을 기리는 추모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살았다”


지난달 27일 폐이식 수술 후 합병증이 도져 갑자기 세상을 떠난 윤한봉(향년 59세) 전 민족미래연구소장의 삶은 한국민주화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전남 강진 출신인 윤 소장은 전남대 재학 중 1974년 민청학련 전남·북 총책임자라는 이유로 15년형을 언도받고 투옥된다. 이듬해 2월 다행히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엄혹한 군부독재 치하에서 홀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는 긴급조치 위반 등으로 투옥과 도피생활을 반복한다.

1980년 광주에서 5·18민중항쟁이 발발하자 전남도청 점거를 배후에서 사주했다는 이유로 신군부의 표적이 된다. 잡히면 사형될 거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그는 81년 4월 경남 마산항에서 미국행 화물선에 몸을 싣는다. 경남 거창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던 정찬용의 동생 정찬대가 외항선 2등 기관사 신분을 이용해 그의 밀항을 도왔다. 1평 반 남짓한 환자용 화장실에서 8끼의 식사와 두 주먹의 잣, 마른 멸치와 새우 한 줌, 꿀 두 수저로 35일을 연명했다.  

‘제 1호 정치 망명객’. 그러나 그에게는 조국의 산하와 동지들을 그리워하며 이국의 우수(憂愁)를 누릴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든 동지들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채무감으로 민족학교 설립과 재미한국청년연합 등을 결성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물심양면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는 망명생활 12년 동안 세 가지 원칙을 철저히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첫째,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는다. 둘째,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셋째, 도피 생활 할 때처럼 허리띠를 풀고 자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

5·18의 마지막 수배자로 살다가 김영삼 정부에 의해 수배가 풀린 93년 5월 19일, 그는 12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끝내고 광주로 돌아온다. 그가 광주에 와서 한 처음 한 일은 망월동으로 가 5월 영령들 앞에서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일이었다.

연이은 귀국환영 인사자리에서도 그의 인사말은 한결 같았다. “명예가 아닌 멍에로 살아가겠다”, “퇴비처럼, 짐꾼처럼 열심히 살아가겠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을 지켰다.

그는 94년 5·18기념재단 창립선언문을 직접 작성하고 기념재단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또 민족미래연구소 설립, 들불야학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그동안 못다 했던 일들에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오해도 적지 않았다.

강직했던 성품 탓인지 그는 뒷전으로 물러나 앉아 후배들이 차려주는 밥상머리에서 훈수나 던져주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5·18을 훈장으로 아는 도시, 전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도시, 항쟁정신·대동정신을 가로막는 그 모든 것들을 향해 가차 없는 독설을 품어댔다. 그 때부터 그의 이름 앞에 ‘광주의 이단아’, ‘광주의 섬’이라는 별칭이 붙기 시작했다.

그에게 이런 현실은 미국에서의 망명생활 때보다 더 답답하고 힘들게 다가왔다. 소외된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도그마’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두터운 벽에 절망했다. 그 때부터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폐기종과 함께 더 외롭고 고통스러운 ‘제2의 망명생활’이 광주에서 계속됐다.

그는 지난해부터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목포의 한 아파트에서 요양생활을 해왔다. 정상인의 11% 수준의 호흡량으로 버티던 그는 폐이식 수술이라도 받아 운동일선으로 돌아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운명은 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의 미완의 혁명은 이제 남은 이들의 몫이다. 

28일 저녁, 그의 빈소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소설가 송기숙, 조비오 신부, 이홍길 5·18기념재단 이사장, 강신석 목사, 이기홍 변호사, 문규현 신부 등 각계의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그의 오랜 동지인 이강 씨는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에 안타깝고 또 안타까울 뿐”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방문도 줄을 이었다. 전날에는 이해찬 전 총리가 다녀갔고 28일에는 한명숙 전 총리,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이 고인의 영정 앞에 옷깃을 여몄다.

손 전 지사는 “지난해 9월 민심대장정 때 선생의 집에 들러 뵌 이후 건강이 나빠져 걱정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하며 “5·18정신은 민중의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변하지 않는 철학을 갖고 계셨다”고 고인을 회고했다.

 한편, 30일(토)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진 고인의 장례식은 이홍길 5·18기념재단 이사장과 함세웅 신부 등이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오전 9시 조선대병원에서 발인해 옛 전남도청 앞마당에서 노제를 지낸 뒤 오전 11시 국립5·18민주묘지에서 영결식을 갖고 ‘광주’ 품에 묻혔다.

▲ 고인의 모습.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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