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와 비이성 사이에서
해체와 비이성 사이에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2.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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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시평]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얼마 전 모 그룹의 총수가 아내와 자식만을 빼놓고는 다 바꿔 보자는 취지의 발언을 화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는 10여 년 전에도 그 같은 발언을 하여 신선한 충격을 던진 적이 있다.

이른바 ‘X파일’로 알려진 정치권에의 비자금 제공사건 수사로 지난 몇 달간 물끓던 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뜨악해진 틈을 타 귀국하면서 한 발언이라 더욱 관심을 끌었던 것 같다. 기존의 질서와 조직에 안이하게 머물러서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뒤지고 만다는 경구일 것이다. 그 같은 폭탄성 발언에 그가 몸담은 기업은 물론 언론들이 민감한 반응은 보였음은 알려진 대로이다.

가히 해체적 발언이다. 사실 그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서 안전판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구조조정이라는 구호 아래 심지어 막 초급사원을 벗어난 대리급들도 조직의 이익 창출에 대한 기여도가 미흡하면 이내 명퇴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중소기업들은 시장 논리나 경쟁력과는 무관하게 대기업의 손에 명운이 달리곤 한다. 나아가 비정규직 노동시장을 돌아보면 온 사회가 해체의 논리에 몸살을 앓고 있어 보인다.

'해체(deconstruction)'는 원래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우리 사회에 들어서도 예술 분야를 중심으로 문법이 파괴된 시, 전위 예술 분야 등에서 널리 회자된 적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사고의 일부문만이 본말이 전도된 채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데리다 주장의 핵심은 이른바 이성(理性)으로 무장된 서구 정신이 지극히 비이성적이라는 것이다. 이성이라는 미명하에 자본가와 관료 조직의 전횡과 횡포가 극에 달했으므로, 그는 곧이곧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교과서적인 지식의 타당성을 전면적으로 의심하고 새롭게 수립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가령 미국이 자국민에게는 인권과 자유를 외치면서, 가난한 나라의 자결권과 인권을 헌신짝 보듯 하는 것도 데리다에게는 비판과 해체의 대상이다. 결국 그는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지위와 민중의 희생으로 불룩해진 주머니를 풀 때, 잃어버린 이성과 희망의 싹은 살아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모름지기 우리 사회의 구조 조정과 해체도 제자리를 찾으려면, 가진 자들과 숨은 권력이 자신들을 둘러싼 금단(禁斷)을 허물 때 비로소 생동감을 띠게 될 것이다.

아무런 생산적 노동이 없이 천문학적인 축적을 해놓고, 얼마간의 자투리 돈을 용처도 명시하지 않은 채 슬그머니 내놓는 것으로 본질을 가려서는 안 된다.

몇몇 대기업의 귀족 노동자들이 자신의 지위를 철통같이 하고, 임금의 사회적 배분에는 입을 다문 채 날로 늘어가는 비정규직 문제에 눈을 감는 사회는 비정상이다.

상아탑을 장악한 몇몇 교수들이 철밥통을 끌어안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시간강사들이 대학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방치하는 사회의 지식에서는 부패한 냄새가 진동한다.

몇몇 정상배들이 모여서 노른자위는 다 차지한 다음에, 바늘구멍 같은 공개경쟁을 치르게 하는 사회는 결코 통합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다.

몇 푼의 돈으로 입을 막고 손을 묶어,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기업주에게 해체의 칼날이 주어지는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차량으로 뒤죽박죽이 된 사거리에는 나가지 않은 채, 창밖에 내리는 눈발을 보며 무인 카메라와 카파라치에게만 떠맡기는 관료에게는 공복의 자격이 없다. 이런 사회는 불신과 불화로 자멸해 가기 마련이다.

달콤한 영양 덩어리로 뭉쳐진 몸통은 놔둔 채 도마뱀이 발을 자르듯 해서는, 해체의 목표는 결코 달성되지 못한다. 모름지기 기득권자들이 대를 물려가며 누려온 지위와 경제적 안정을 함께 나누겠다는 철학이 확고할 때, 그 사회에는 통합이 있고 내일이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에 횡행하는 이성을 재정립해야 할 때다. 숨은 권력만을 감싸는, 법이라는 칼날을 한쪽만 쓰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기득권자들부터 먼저 자신을 해체하고 겸허하게 삶의 출발점에서 서서 나누는 모습을 솔선해 보일 때, 두 얼굴을 가진 이성은 비로소 하나로 합쳐져 바른 역사를 열어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박몽구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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