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름, 일상과 非일상 사이
대보름, 일상과 非일상 사이
  • 시민의소리
  • 승인 2006.02.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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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대한민국]진주 자유기고가
"보리밥이랑 찰밥 먹으러 와, 언제 올 거야?"정월대보름 전날 엄마가 전화를 하셨다. "야, 보름이네. 먹으러 가야지 엄마, 맛있게 해."

대보름은 설이나 추석에 비해 명절이라고 하기엔 좀 부족함이 있다.
어린 시절, 아니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명절 전날 가슴이 오묘하게 설레곤 했는데, 보름날은 설렘이 없었다. 그러나 내 기억속의 대보름은 풍요나 건강을 기원하는 조상들에 대한 제사와,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보름음식들. 그리고 보름 전날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보름새기)는 아버지 말씀에 생긴 불면의 고통과, 집 대문 앞에 놓은 약밥이랑 나물을 정말 누가 먹으러 오나 몰래 훔쳐보았던 호기심, 보는 사람마다 '내 더위~' 하며 놀았던 일상적인 재미와 의례가 뒤섞여 있다.

축제가 되어가고 있는 대보름

시간이 훌쩍 넘어, 대보름이 일상적인 재미나 의례의 의미가 없게 되었고, 공부한답시고 민속조사를 하러 가는 선생님들을 따라 대보름 행사를 보러 가게 되었다. 이제는 구경꾼이 된 것이다.

대보름행사는 시골 마을에서 한다. 보름 전날 밤 자정 전부터 준비하여 동제를 지내고, 아이들은 쥐불놀이를 하고 어른들은 달집태우기를 한다. 보름날은 동네에서 꽹과리를 치는 사람을 앞세워 신나게 풍물을 하면서 놀다가, 줄다리기를 하며 당산나무에 그 줄을 묶는다.

구경꾼들이 늘어갈수록, 시골 마을에는 대보름을 준비할 사람이 줄어든다 한다. 마을에서 행해왔던 대보름 행사를 우리 같은 외부인들을 위해 연출하려 해도 꽹과리를 칠 사람이 없어지고, 노인네들뿐이어서 쉽지 않기도 하다.

언젠가부터 대보름이 전국 곳곳에서 축제가 되었다. 북제주군의 정월대보름 들불축제, 화왕산 억세태우기 축제처럼 축제 이름이 따로 있어 특색 있게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정월대보름 행사는 세시풍속과 민속놀이 중심으로 프로그램화되어 있다. 연날리기도 하고, 윷놀이도 하고, 부럼 까먹기도 한다. 체험중심의 프로그램과 관람중심의 프로그램이 적절하게 들어가 있어 도시에 사는 가족나들이에 그만이다. 수많은 지자체들이 각양각색의 축제놀음과 축제싸움에 열을 올리는 사이, 대보름도 관광수익을 위한 하나의 소재가 된 것일까. 아니면 부모들의 소중한 삶의 양식이 21세기엔 사라진 민속 문화가 되어, 다시 현대적 감각에 맞게 그 의미를 되살리는 시도인가.

'일상'이 아닌 연출형 행사 아쉬워

대보름은 미신이라 여겨 지내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들에게 그 '미신'은 한해의 시작을 위한 기원으로 일상의 즐거움과 활력이었을 터다. 그러나 일상이 아니게 되면서 어떤 이에겐 미신이 되고 어떤 이에겐 체험하고 관람하는 문화가 되어 가고 있다. 집안과 마을 안에서 살아 숨 쉬던 놀이와 의례가 집 밖과 마을 밖으로 나가게 되고, '미신'이었던 일상은 문화로 포장되고 非일상이 되어간다. 문화가, 세대 간 소통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한다면, 그 소통의 방식은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제는 도시에선 약밥이랑 나물을 대문 앞에 내놓는 걸 볼 수 없다. 우리집 대문 앞에도 보름음식이 놓이지 않은지 오래다. 그래도 아직 남아 있는 즐거움은 가족들과 대보름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고 옛이야기들을 나누는 것이다. 어머니가 약밥과 나물을 하는 동안 아버지는 우리들과 부럼을 까면서, 나는 한번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와 할머니이야기, 큰아버님들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듣곤 했었다. 젊은 어머니는 보름음식을 번거로워하고, 일에 지친 아버지는 보름 따윈 잊어버렸을 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눈썹이 셀까 두려워 잠들지 못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게임과 인터넷에 눈썹 셀 일이 없을 것이다. 문화로 포장된 모든 체험과 관람의 어느 한 구석에, 부모세대들의 삶의 흔적들과 너무도 달라진 아이들의 생활방식이 소통을 꿈꾸는 공간이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진주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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