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담아내는 신들린 춤사위…(상)
영혼 담아내는 신들린 춤사위…(상)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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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현대 전위 무용계의 거인-홍신자
"'춤'은 내 육신과 혼을 모두 바치는 존재 그 자체"

세상이 시끄럽다, 몸이 근질근질하다. 땡볕을 견디기에도 몸은 소 불알인데 때이른 장마가 마음에 곰팡이까지 슬게한다. 아무리봐도 다 제 탓인 것 같은데 다 남의 탓만하며 멱살잡이를 하고 있다. 생각건대 우리 시대에 어른들은 다 사라진 것 같다.

나이 먹어가는 것이 두렵다. 노탐(老貪)만 더해 가는 꼴이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서울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노소를 불문하고 여자들 행색이 가관이다. 축축한 공기에 뒤섞인 화장품 냄새가 역겹다.

맨발 투성이고 슬리퍼 패션이 따각따각 소음을 보탠다. 말끔한 정장에 슬리퍼라니, 때곱이 발뒤축이며 발가락 사이에 뒤엉겨 붙어 있는 것은 고사하고, 시커먼 발가락에 덧칠해지고 벗겨진 매뉴큐어는 꿈에 볼까 무섭다.

고놈의 쎅시한 것이 무엇인지 등허리, 어깨죽지를 다 파먹어 버렸다. 기품도 없는 요염이라니, 필시 천박함과 쎅시함을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하철은 역시 지옥철이다.

모두다 인문학의 퇴행이 불러온 아니 어른 부재가 불러들인(인문학이 헐거워진 탓은 근원적인 삶의 교육 부재에서 온 것으로서 말하자면 방향타를 잡아 줄 중추가 무너져 내렸다는) 탓일게다.

지하철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안성행 버스를 타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진 듯 하다. 세계 전위 무용계의 큰별인 홍신자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동양적 사유를 서양 춤에 접목시켜 춤의 세계를 한 차원 더 승화시킨 명장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세상이어선지 아이러니컬 하다.

마치 지옥에서 연옥의 터널을 거쳐 극락으로 이르는 길처럼, 플라타너스가 촘촘히 박힌 국도를 따라 한시간을, 다시 죽산면 읍내를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가자 극락 같은 도량인 ‘웃는 돌’(인도에서 깨달음 왔을 때 웃는 웃음)이 들앉아 있다.

‘(사)웃는 돌’은 10년전부터 조금씩 터전을 만들어 가는 곳으로 공연단체의 범주를 벗어나 물단식, 포도단식, 명상캠프, 마사지캠프, 흙집짓기 워크샆 등 대체의학센터까지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는 종합캠프장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곳이다.

볼장 다 본 현대인들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회복 시키는 예술요법(?) 요양소인 셈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죽산 국제예술제’ 첫날이라 야단법석을 준비하는라 정신이 없다. 홍선생은 공연 리허설로, 세계 각국에서 온 춤꾼들은 그들대로 부산을 떨고 있는 것이다.

'춤'은 내 육신과 혼 바치는 존재 바로 그 자체
'춤'통해 내 안의 신(神)을 만나 대화하고 춤추고
무대에 설 때면 모든 관객은 또 다른 신(神).
내 신(神)이 그 신(神)과 만나 하나가 되었을 때 '열반'


살구나무 그늘에 앉아 지난 23일 홍선생의 광주 공연을 떠올려 본다. 반쯤 찬 객석에는 전국에서 온 매니아들과 지역 연극단체 단원들, 그리고 행사를 주최한 지인들이 객석을 차지했을 뿐 지역 무용계나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은 보이지 않았던 사실이 떠오른다. 홍선생은 내심 생애 첫 광주공연이어서 가슴이 설랬다면서 멋쩍게 웃던 모습이 오버랩 되자 얼굴이 후끈 달아 올른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지역 무용계가 난리법석을 떨면서 반기고 학생들을 몰아치면서 꼭 가서 인사하고 교분을 트고 또 다른 세계를 배우라고 독려하고, 함께 어울려 손님대접 핑계로 한 번 걸판지게 판을 벌여도 서운할 것 같은데 정작,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서운하고 안타까웠을꼬, 생각하니 쓴웃음이 절로 난다. 풍설에 의하면 아예 학생들이 가려는 것도 못가게 학점채벌을 한다는 지경이니 제발 유언비어요, 풍설이기를 바랄 뿐이다.

마침내 홍선생과 마주 앉았다. 다짜고짜, 왜 하필 춤이었느냐는 질문에 “나는 내 인생을 한 번 불살라 버릴 것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외국 나갈려고 영문학을 했고 3년을 준비한 끝에 미국으로 갔는데 1년이 지난 어느날 춤을 보고 결정 했지, 스물일곱 나이에 무용한다니까 주위에서 말리고 난리 였는데, 나는 원래 행동파거든, 춤의 혼의 화살이 가슴에 박혀서는 춤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래서 그때부터 몸을 찢기(?) 시작 했지.”

"가난하고 배고프고 뉴욕 타임스에 처음 내 사진이 실렸을 때, 그날 아침 내 주머니 속에는 1달러밖에 없어 끼니조차도 대책이 없었지만 나는 오직 춤만 출 수 있다면 그런 가난 따위는 상관 않했어. 슬프고 억울하고 보상 받고 싶은 생각은 해보지도 않았고 오직 내 예술혼을 춤에 바치고 싶을 뿐이었지”라는 말처럼 홍씨는 그렇게 7년을 몸을 찢은 뒤인 1973년 신인 안무가로 발탁되어 ‘제례’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했고, 그 파괴적인 형식과 충격적인 내용으로 일약 스타가 된다.

/이수행[시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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