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에 차이는 것이 시간이지만…- 「존재의 형식」과 「찔레꽃 기념관」
발길에 차이는 것이 시간이지만…- 「존재의 형식」과 「찔레꽃 기념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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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서 서점진열대에 각종 문학상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들이 곧잘 눈에 띈다. 전대정문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김모씨와의 식사자리에서 수상작들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올해는 젊은 작가들이 주목을 많이 받았다, 작가의 세대가 점점 중심이동을 하고 있는 듯 하다, 등등이 주요 골자였다.

그런데 작품들을 꼼꼼히 읽어보면 젊은 작가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이야기는 본래 과거형으로 쓰여지기 마련이다.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를 현재적의미로 재해석하는 것이 소설의 기본형식이라면, 과거의 시간을 어떤 형식으로 존재하게 만드는가에 따라서 소설의 세대구분도 가능할 것이다. 잊혀져 가는 것들은 저마다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그 존재의 형식을 창조해야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올해로 3회째를 맞는 황순원문학상의 수상작인 방현석의 「존재의 형식」과 제4회 이효석문학상 수상작인 윤대녕의 「찔레꽃 기념관」이 관심을 끈다. 「존재의 형식」은 그 제목이 암시하듯 과거의 시간이 어떤 형식으로 현재의 시간에 존재하는가하는 의문에 직접 맥이 닿아있다. 과거의 시간은 뜨거우면서 아픔이겠고, 상처이면서 삶을 되살아가게 하는 반성의 근원이겠다. 한국의 80년대라는 시간은 이후 그렇게 기억되었다. 아프고 쓰리지만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외면하려고 했던 어린 고아의 눈동자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그 시간은 순장(殉葬)되고 각색되었다. 아마도 작가 방현석도 그런 이유에서 베트남으로 건너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곳엔 ‘반레’라는 이름의 시인이 있었다. 작품에서 그는 한국영화의 시나리오를 베트남어로 옮기는 작업에 번역자로 참여한다. 언어를 옮기는 일은 시간과는 또 다른 역사의 강을 건너는 것이다. 순조로운 그들의 작업은 베트남 전쟁 당시 이른바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남부의 게릴라전에 참가했던 파르티잔들의 이야기를 옮기면서 불화를 겪는다. 북부 닌빈에서 태어난 ‘반레’는 1966년 고교 졸업과 동시에 자원입대했다.

호치민 루트를 타고 내려와 사이공(현 호치민) 남부에서 게릴라로 10년간 미군과 싸웠다. 전쟁이 끝난 1975년, 함께 입대한 300명 중 살아남은 이는 그를 포함해 5명뿐이었다. 본명이 ‘레치투이’인 그는, 시인을 꿈꾸다 전사하고 만 친구의 이름 ‘반레’를 필명으로 삼았다. 직접적인 상흔이 있는 그에게 시나리오에 적힌 전쟁 당시의 이야기는 실제현실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영화감독으로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그가 겪었던 과거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한국의 현실을 벗어나 베트남에서 표류하고 있는 작품의 주인공에게 ‘반레’가 기록하는 과거의 시간은 잊혀지거나 사라지는 상처가 아니다. 아픈 과거는 현재의 시간으로 환원되고 있다. 이것은 소환되는 것과는 다르다. 90년대의 한국소설은 아픈 과거를 아프게 기억했을 따름이다. 이야기는 현재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좋은 소설은 그렇게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순간 탄생한다.

윤대녕은 아픈 과거를 내면의 시간성으로 치환시켜버린 90년대를 대표했던 작가였다. ‘작가였다’라는 과거형의 서술은 「찔레꽃 기념관」이라는 소설이 그의 전작들과 지니는 차별성을 암시한다. 소설은 찔레꽃에 둘러싸인 시골이발소와 시인이였던 이발사에 관한 추억에서 시작한다. 이발사는 총칼 앞에서 시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경험한 후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다. 30년 후 도시의 낡은 오피스텔에서 작가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로 오래전의 그 이발사와 항상 그를 둘러싸고 있던 찔레꽃의 향기를 다시 맡게 되면서 작가라는 직업의 비극성과 자의식을 그려낸다.

작가의 슬픈 운명은 시간이 기록한 슬픔을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다.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윤대녕은 언제나 그 슬픔을 애써 외면한 작가였다. 항상 그의 작품 앞에 붙었던 ‘시원으로의 복귀’라는 수식은 과거의 상처를 더 이전의 과거로 끌고가서 상처자국이 없던 원시의 시간으로 희석화시켜 버린 그의 작업에 대한 화해적인 표현이었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던 서글픔과 비극성은 잊혀진 그 무엇이라는 포괄적의미에서의 기억상실에서 비롯된 것이었지, 이번 작품에서처럼 한국근현대사라는 구체적인 시간성을 확보하지는 못했었다. 이번 작품을 전환점으로 윤대녕이라는 작가의 작품에 붙는 수식이 달라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볼 만 하다. 더불어 90년대를 대표했던 작가의 변모라는 점이 갖는 의미 또한 각별할 것이다.

발길에 차이는 것이 추억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시간의 지층 위에 새기는 갑골문자같은 것이다. 때로 언어는 과거를 오독하고 소설은 오타를 범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지우고 다시 덧쓸 필요는 없다. 시간이 그 기록을 재해석할 것이다. 문학이 과거의 시간이 존재하는 새로운 형식을 찾아야 하는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한국 소설의 거대한 항로가 궤도수정하고 있는 순간을 올해의 문학상 수상작들을 보면서 목격하고 있는 듯 하다.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가슴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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