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오늘]생명의 원기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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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7.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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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철[호남학진흥원 전문위원. 광산중 교감]

포충사에 배향되고 있는 고경명선생은 16세기 한시사(漢詩史)의 주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문학은 의병장으로 순국한 행적에 가려져 후생들에게 올바로 교육되지 못하고 있다. 선생이 남긴 글은 제봉문집 5권 5책, 속집 1권 1책과 유집1권1책이 있는데 모두가 시문집이다. 이러한 시문집 외에도 무등산등반기인 ‘유서석록’이 있다.

허균이 「국조시산」에 비판없이 수록한 시 한편을 읊조려본다.

‘평생 강남에서 잠이 족하여/ 귤과 유자가 마을길에 가득하다/ 붉고 열매 완연한데 부모는 안계시니/ 유적 같은 자식이 있어도 효심을 어찌할 수 없어라.’


제봉이 60세의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정신적 기반도 실은 문학에서 보여준 굳건한 의지에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교육은 선비를 기르는 데 목표를 두고 있었다. 제봉을 바라볼 때 16세기 후반을 살다간 선비 중 한분으로 놓고 보아야 그 참모습이 드러난다.

전통교육으로 길러낸 그 선비들은 학예로써 인격을 다듬었다. 문사철(文史哲)로 냉철한 이성을 시서화(詩書畵)로 뜨거운 가슴을 키우지 않았던가. 그 시절 젊은이들은 제도권 교육말고도 배울 만한 스승을 찾아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봉이 광주 목사 임훈(林薰)과 무등을 탈 때만 해도 한참 일 할 나이였건만 정치적으로는 불운한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의 지성은 날카롭고 장부로서 활달한 기상이 그의 등반기에 잘 드러나 있다. 고을 원님인 임목사가 그를 초청하여 산행을 함께 한 걸로 보아 두 사람의 사이가 자별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후기 사림세력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문벌은 출세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특히 호남인들은 기호(경기충청)나 영남 그 어느 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입장이어서 학문적으로나 문학적 성향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만 호남출신 인물들은 비문벌인 관계로 말미암아 중앙정계와 강한 연계를 갖지 못하여 정치적으로는 뒷전으로 밀리는 신세를 면키 어려웠고, 고위직까지 승진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박상 임억령, 김인후 등도 예외라고 할 수 없다. 제봉 또한 ‘이량(李樑)사건’이 이유가 되긴 했어도 크게 보아 같은 범주에 속한다.

귀향한 전직관료들은 향반들과 어울려서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정자를 짓고, 시주(詩酒)로 교류하면서 풍류를 즐겼다. 원효계곡이나 광주호 주변에 걸려 있는 정자들은 조선중기 이후 전라도의 문화적 분위기를 잘 말해주고 있는 상징적인 문화유산들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별서(別墅)인 소쇄원이나 면앙정, 식영정은 이들 사대부들이 모여 앉아 담론도 하고 때로는 창작도 하던 학문의 도장이었다. 고경명의 시를 관각문학(官人文學)으로 보는 것 또한 그 시기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영남 사림들이 주로 성리학적 사유의 실천과 도학적 학풍을 심화시켰던 분위기와는 다르다. 지금도 사림의 본고장이라고 자처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호남사림들이 반드시 철학이 모자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고봉 기대승선생과 퇴계 이황선생이 13년여 동안 학문과 인생을 놓고 벌인 논쟁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귀감으로 길이 남을 만하지 않는가. 스물 여섯 해나 연하임에도 사단(인의예지)을 이(理)로 보고 칠정을 기(氣)로 본 퇴계의 주장에 반대하면서 7년여 동안 학문적 담론 끝에 마지막 그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여 총설과 후설로 정리한 분은 고봉이었다. 46세의 이른 나이에 타계하지만 않았어도…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가문에 불어닥친 온갖 풍파를 딛고 일어선 고봉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약관의 나이에 유교철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서른 두살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대사성, 대사간에 이르렀다. 그는 경연(經筵)에 출강하여 임금 앞에서 국가 기강 쇄신과 민생의 안정을 역설했다. 또한 대의를 위해 싸우다 간 선비들의 복권과 그 반대편에 서서 선비들을 탄압한 남곤 윤원형 등의 죄를 밝힐 것을 주장하였다.

금세기는 ‘문화와 정신의 세기’라고 한다. 세계화라는 패권주의에 의해 왜곡된 우리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물질만능의 가치관이 우리사회 전체를 뒤흔들고 있기도 하다. 박지원이 선비는 ‘생명의 원기(元氣)’라고 한 말을 곱씹어본다. 고봉학술원이 있으나 그렇게 활발히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다.

3.1운동을 주도했던 동학의 다른 이름인 천도교 그 중심에 섰던 양한묵선생, 벌교 출신 나철(羅喆)선생의 대종(大倧)사상도 시급히 재조명되어야 한다. 다산학의 산실인 강진은 또 어떤가, 자치단체들이 경제를 살린답시고 새로운 브랜드를 찾느라 허둥대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규철(호남학진흥원 전문위원. 광산중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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