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 속 ‘태백산맥’을 가다
‘장맛비’ 속 ‘태백산맥’을 가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7.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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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민족문학작가회의 답사 참가기

‘더 쏟아져라! 어서 한번 더 쏟아져서 바웃새서 숨은 뿔갱이 마자 다 씰어 가그라! 나무 틈새기에 엎딘 뿔갱이 숯뎅이같이 싹싹 끄실러라! 한번 더, 옳지! 하늘님 고오맙습니다!’(소설 ‘장마’중)

윤흥길은 1973년 그의 중편소설 ‘장마’(문학과 지성)에서 아들을 각각 국군과 빨치산으로 보낸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갈등과 대립을 통해 한국전쟁이 남긴 역사적 생채기를 탁월하게 묘사한 바 있다. 윤흥길은 이 소설에서 국군아들의 ‘전사통지서’를 계기로 파국에 이를 것 같았던 두 인물을 ‘구렁이’로 대변되는 민속신앙에 기대 갈등해소를 주선함으로써 남북화해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본격 여름을 마중하는 장마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던 지난 6일. 광주·전남민족문학작가회의(회장 김희수) 회원과 일반인 등 40여명은 ‘온 세상을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는’ ‘장마’의 세계로 문학적 기행을 떠났다. 기실 ‘장마’는 ‘민족적 재앙’의 다른 표현일터.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의 비극적 역사가 살아 숨쉬는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 보성군 벌교읍만큼 ‘장마’가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비원이 서린 곳도 드물 것이다.

내처 달리는 버스 안에서 태백산맥에 대한 품평회가 진행됐다.
김희수 회장은 “소설 태백산맥이야말로 1948년부터 53년까지 해방공간이라는 격동기의 역사를 담은 역사문학의 봉오리”라고 한껏 추켜세운다.
이어진 감상평에서 회원들은 저마다 “태백산맥을 읽은 후 느꼈던 알 수 없는 진한 슬픔과 답답함”내지는 “태백산맥은 소설적 허구” 또는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한 인명살상의 비극적 삶”에 대해 토로했다.

보성 벌교 한국전쟁 비극적 역사 서린 곳
이데올로기 대립…가슴 아픈 상흔 아련히
비운의 홍교 아래로 싯벌건 황톳물 흘러


그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기자는 ‘역사와 소설’에 대한 긴 상념 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결국 그 갈증과도 같은 상념의 끝자락에서 만난 것은 ‘태백산맥은 여전히 진행중인 역사’라는 평범한 상식이었다. 해갈되지 않은 갈증은 바로 ‘미완의 역사’가 뿜어내는 이상열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태백산맥이 비록 현실을 재구성한 허구의 산물이지만 인물들이 구체적인 전형성을 획득하고 있는 만큼 당대 민중들의 삶과 역사에 대한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이 같은 견지에서 한국전쟁을 이데올로기(=허위의식)의 대립-그것은 구체적인 요구를 사장한-으로만 파악하는 것은 다분히 피상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이데올로기가 내포했던 것은 무엇이며 어떠한 요구들로 외화 되고 외연의 보폭을 확대해갔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자주독립과 친일파 청산, 단독정부수립반대, 토지개혁 등 시대적 요구의 외화로서 이데올로기를 파악할 때 당시 좌우대립의 정확한 맥락을 짚어낼 수 있다. 삶과 역사라는 의미망 속에서 포착되지 않은 이데올로기 논란은 한낱 싸구려 감상으로 흘러버릴 위험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벌교읍에 도착했을 때 홍교 아래로는 비 때문에 불어난 수량으로 싯벌건 황토물이 요동치고 있었다. 본래 홍교에 덧붙여진 급조된 다리에는 불순한 ‘상혼’이 뗏국물처럼 흐르며 ‘벌교’탄생의 역사적 아이러니를 반복하고 있었다. 벌교는 전통적으로 존재했던 도시가 아니라 일제시대 수탈을 위해 급조된 것으로 화순의 석탄과 동복의 쌀 등을 여수로 옮겨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로 활용됐었다.

홍교 아래쪽으로는 소화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를 소설 속의 무당 딸 소화와 마치 무슨 연관이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간 망신당하기 딱 좋다. 소화다리는 본래 부용교라는 여엿한 명칭이 있는데도 사람들이 일제 소화시대 때 만들어져 그렇게 부른단다. 이 다리는 여순사건 이후 퇴각하던 14대 연대 병력이 거쳐가며 좌우익간 피의 보복 학살극이 자행됐던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소화다리를 건너 도착한 곳은 태백산맥에서 김범우의 집으로 묘사된 전통 한옥 집이었다. 집밖에는 ‘임봉열’이라는 문패가 버젓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집주인 김혼심(74) 할머니는 45년전인 1958년부터 이 집을 지켜왔다고 한다.
“요리로 와 앉으시오. 모도 비온 디 애쓰시오.”
김 할머니는 매일 찾아드는 답사객들이 귀찮을 법도 한데 싫은 기색한마디 없이 손님을 위해 마루바닥을 훔친다.

답사 안내를 맡은 한광석씨는 답사객들을 한사코 ‘김범우 집’으로 묘사된 한옥 가옥 뒤쪽으로 몰고 갔다. 그래야만 당시 이데올로기적 대립에 휩싸이지 않고 자기재산을 지키려했던 지주들의 생각을 배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 생각이 참 기발하고 참신해 색다른 감흥을 주기에 충분했다.

조정래가 태어나 자란 허름한 가옥은 지금은 서울 사람에게 팔린 상태로 재작년부터 세입자가 입주해 살고 있었다. 조씨는 가끔 답사객들과 함께 이 집을 찾는 다는 것이 그의 귀뜸이다. 점심식사 후 소화가 살던 집터를 찾았지만 그 집터는 이미 사라지고 잡풀만 무성했다. 대신 그 옆쪽에는 현부자네 제각이 웅장하게 새 단장을 하고 있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현부자네와 인접한 구인사 아래 쪽 연못에는 때 마침 백련과 홍련이 피었는데 어쩌면 연꽃이 가장 더러운 곳에서 피는 꽃이라는 속설보다 생과 사의 치열함이 가장 왕성하게 교차하는 곳에서 피는 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기실 피안의 경지보다는 서로 살을 부비며 생노병사의 해결하지 못할 고해를 떠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새로 새록 돋는 삶의 애착을 느끼는 것이 아닐까.

답사를 마치고 광주로 돌아오는 그때까지 빗줄기는 가늘어졌다 굵어졌다를 반복할 뿐, 이내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긴 장마가 끝나고 나면 이곳 ‘태백산맥’ 소화의 빈 뜰에도 얼굴을 내민 햇살에 녹음이 푸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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