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지킴이의 독백
박물관 지킴이의 독백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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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의 파괴와 약탈을 반달리즘이라고 한다. 이는 5세기 훈족(반달족)이 로마제국을 침입하여 침략한 땅의 문화유산을 파괴한 행위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최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미국이 점령한 후, 국립박물관이 이라크인의 난입으로 문화재가 파괴되고 약탈되는 장면을 미국 CNN 방송에서 아주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이러한 미국 방송사의 시각은 2001년 3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이 동서교역의 중심지인 바미얀 석굴의 높이 52.5m와 34.5m 불상을 파괴할 때도 동일하게 반영되었다. 바미얀 석굴은 4∼5세기에 제작된 불교문화재로, 동양에서 발생한 불교가 서쪽으로 어느 지역까지 전파되었는지를 알려주는 유물이었다. 그리고 상단 천장에 이란에서 숭배되던 신의 형상이 벽화로 그려져 동서미술의 교류와 영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1500년 된 문화유산이 종교적인 차이에 의해 한 순간에 폭파된 것이다.

당시 전 세계의 박물관과 연구자들은 문화유산을 파괴한 탈레반 정권을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결국 바미얀 석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흔적만이 남아있다. 당시 미국의 많은 방송은 탈레반 정권의 부도덕성과 야만적인 문화유산의 파괴행위를 비난하였는데, 최근 미국은 후세인 정권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내고, 세계 4대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유산이 모여있는 바그다드 국립박물관 주변을 폭격한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아직까지 기원전 4000년경의 수메르인? ?역사가 밝혀지기 전에 그들의 유산이 한 순간에 파괴된 것은 세계사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다. 박물관의 소장품이 약탈되는 것을 보면서도 막지 못한 현지 박물관 관계자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는 전쟁 중이라도 상호 문화유산과 박물관 폭격을 금한 ICOM(국제박물관협의회, 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의 헌장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더불어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세계 4대 문명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 유산
모여있는 바그다드 국립박물관 주변 폭력한 것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어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에서 도난 당한 유물들은 이라크로 환수되지 못한 채, 몇 년 후에 세계 경매 시장이나 밀거래를 통하여 부유한 나라의 소장자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제 침략기에 개성 근방의 무덤을 도굴하여 고려청자를 일본인에게 팔아 넘긴 힘없는 한국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생존을 위하여 조상의 무덤을 파헤친 무지한 사람들을 감쌀 마음은 없지만, 다른 나라 조상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을 헐값에 사고자 했던 일본인의 골동품 수집 열기는 문화재 도굴의 동기를 제공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국민에 의한 바그다드 국립박물관의 문화재 약탈을 이라크인의 문제로 국한시키려는 미국의 방송국의 보도태도는 문화유산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성에 동조하는 시각이다.

이러한 문화유산의 파괴가 단지 다른 나라의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만날 때, 53년 전 우리 민족이 겪은 피해를 생각하게 된다. 통일신라 후기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가지산파의 장흥 보림사와 16국사를 배출한 순천 송광사 등이 전소되고, 석탑이나 부도에 남아있는 동족을 겨누던 총알 자국을 보면서 전쟁이라는 인간의 행위가 인류에게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일제침략기와 근대화 과정 중에 거래된 수많은 유물은 대부분 출토지역을 알 수 없다. 단지 금전적인 가치만이 남아있는 골동품으로 거래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들 안에 자리잡은 반달리즘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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