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런 봄의 향연 속으로 망명
싱그런 봄의 향연 속으로 망명
  • 시민의소리
  • 승인 2003.04.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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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불알풀이며 쇠뜨기며 달래가 서둘러 지척의 봄을 누설하더니 이제 진달래며 산벚이 앞산 등성이를 숨가쁘게 방화하기 시작한다. 검은 등 뻐꾸기는 우후후후- 도통한 비웃음을 천지간에 긴 여운으로 흘려놓고 벌과 나비는 열린 자궁처럼 부푼 꽃의 은밀한 속살을 기웃기웃 함부로 참견하며 생의 한나절을 한가로이 방목한다. 얼음이 풀린 개울에는 버들치들이 우왕좌왕 분주한 일상을 떼지어 몰려가고 돌 위에 햇살을 조는 나른한 개구리는 둥그런 눈을 게으르게 껌벅이며 시린 겨울을 내내 침묵하던 쟁명의 목청을 가다듬고 있다. 논둑에는 담배를 빼어 문 늙은 사내들이 올 한해의 농사를 깊은 시름으로 가늠하며 허리 굽은 허름한 일생을 망연히 서성이리라.

닭들에게 일용할 양식과 물을 갈아주고 아직 여린 풀을 한 짐 캐어 운동장에 던지고 나니 슬슬 노곤하다. 하여 볕이 환한 마루에 부뚜막의 고양이처럼 잠시 졸고 있으려니, 쾅쾅 콰콰쾅! 갑작스런 굉음이 온 골짜기를 무차별 폭격한다. 봄날의 다소곳하던 고요가 전율을 뒤척이고 나의 달디단 졸음이 순간 상처 입는다. 운동장에서 흙을 두발로 끼얹어 흙 목욕을 하고 이리 오너라 업고노자! 암수가 서로를 희롱하거나 풀을 쪼면서 옹기종기 따스한 봄볕을 논의하던 닭들도 후다닥, 양계장 안으로 뛰어들며 목을 길게 늘여 뜨려 꼬꼬댁 꼬꼬꼭! 까닭 모를 불안을 일제히 절규한다.

산아래 도로 공사장에서 포크레인으로 바위를 깨뜨리는 소리다. 한동안 조용하더니 다시 시작하나 보다. 지난 겨울에도 공사장 소음에 놀란 닭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산란률이 현저히 떨어지고 급기야는 동료들의 항문을 마구 쪼아대 유혈이 낭자하더니 결국 내장이 기어 나와 하루에도 십여 마리씩 죽어나가곤 했다.

한번 훼손되면 좀처럼 회복하기 힘든데
아무리 필요하다지만 개발 신중 기해야


작년만 해도 우리 마을로 향하는 길은 자동차 밑바닥이 쿵쿵거리는 비포장 도로였다. 아래 마을까지 2킬로미터 남짓은 이미 포장되고 나머지 4킬로미터 정도가 마을 입구를 지나 건너 마을과 면소재지로 연결된다. 공사는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었다. 지역주민의 견해를 묻는 공청회 한 번 없이 산이 먼저 깎여 나가고 논이 파헤쳐지고 개울도 일부 복개되기 시작했다. 산을 돌아 구불구불 하늘의 기슭을 향해 실개천처럼 흘러가던 하얀 흙 길이 넓고 검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고 만개한 바람과 햇살이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며 살아있는 것들의 쉼터가 되어주던 아늑한 개울도 딱딱한 콘크리트 구조물의 발 밑에 차가운 어둠의 정적으로 감금되리라.

물론 도로를 뚫고 다리를 놓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한번 훼손 된 자연은 좀처럼 회복하기가 어렵다. 아니 영원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꼭 필요한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는데도 사전에 신중하게 검토하고 다양한 의견을 거듭 수렴하는 자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할 것이다. 하지만 요즘 돈벌이와 향락을 위해 산과 강과 바다를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 버렸다. 산허리를 잘라 골프장과 리조트와 모텔을 쌓고 강바닥에 무거운 삽날을 들이대 모래와 자갈을 게걸스럽게 퍼 올리고 바다와 갯벌을 거대한 둑으로 막아 단단하게 생매장하는, 마치 살점이 퇴색한 회색의 형해처럼 말없이 드러누운 ‘침묵의 봄’을 우리는 지금 여실히 목격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리고 무엇을 얻고자 이렇게 까지 파헤치고 부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자연에 대한 마구잡이 식의 약탈과 착취, 그 폭력의 이면에는 인간의 음험한 오만이 배암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계를 근거 짓는 의식적 주체로서“세계는 나의 표상”임을 공언하며 세계를 자기 앞에 세우고 수학적·물리적 계산과 측정을 통해 재단되어야 할 객관적 대상으로 규정하여 결국 세계를 피표상의 식민지로 전락시켜온‘지구적 제국주의’로 전화한 인간 혹은 그 정신과 오만, 그것은 어쩌면 인간과 세계 모두를 불행한 파멸의 재앙으로 이끌 에리직톤의 위장이 아닐까?

이 봄, 한번쯤 망명을 꿈꿀 일이다. 천년을 완강하게 오직‘나 홀로’의 견고한 성안에 갇힌 고독한 메두사, 그 석회질의 시선과도 같은 각질의 마음에 푸른 기억을 일깨우는 촉촉한 성찰의 비가 내려 비로소 굳은 땅이 풀리고, 훈풍이 불고, 그 바람의 끄트머리에 실려온 허공을 오래 방황하던 민들레 홀씨들이 줄기마다 희고 노오란 해맑은 절정을 만발하고, 부러져 꺽인 나무들은 마른 가지에 연두 빛 새움을 울컥울컥 토해내며 일제히 부신 반짝임의 난무를 아우성칠 무성한 잎들을 준비하고, 상심한 새들도 고단한 하루를 접고 붉은 노을의 중심을 향해 귀소의 저녁을 비상하는, 산이 산이며 물이 물인 곳의 아늑한 속살에 말없이 깃들은 뭇 이름들이 서로를 갈구하며 절실히 호명하는 화육의 풍경…, 그 풍경의 화폭에로 겸허하고도 즐거운 망명이라면, 장엄하지 않으랴? 오오, 저 화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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