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파워>아줌마로 세상 살기
<여성파워>아줌마로 세상 살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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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날 눈이 펑펑 쏟아졌다. 결혼전날 눈이 많이 내리면 결혼해서 잘 살거라고, 아마 우리는 정말로 잘살려나 보다 그렇게 웃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희망으로 부푼 시간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농사를 짓는다고 농촌에서 몇 년을 살았다.

주인 없는 농촌의 빈집을 청소하고, 도배도 다시 하고, 장판도 다시 깔고, 우리가 함께 할 보금자리를 가꾸고 꾸미느라고 바쁘기도 했다. 우리는 정말 아무 연고도 없는 마을에서 땅한 평 없는데 도 농사를 짓고자 그렇게 작은 출발을 하고 있었다.

결혼하고 첫해 배 과수원을 임대하여 배 농사를 지었다. 명색이 과수원집 딸내미였어도 무늬만 농사꾼이라 배를 솎는 일도, 싸는 일도 서툴기 짝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해는 그나마 남들은 태풍피해로 속이 쓰렸지만, 우리는 바람이 잘 안타는 곳에 과수원에 있어서인지 배가 많이 안 떨어져 생산비도 건지고 약간의 이익을 낼 수도 있었다.

그 다음해에 딸이 태어나고 나서부터 생활비도 더 들어가기도 했지만, 유래 없는 배 풍년으로 배 값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속이 쓰렸다. 임대료도 만만치 않게 주었는데. 그리고 그렇게 몇 년 동안 땅 한 평 없이 남의 땅 임대 만해서 배 농사를 지었는데, 통장의 잔고가 불어날 생각은 안하고, 늘어만 나는 것이 빚이었다.

남들은 촌에서 억은 되어야 농가부채로 쳐준다고, 몇 천 만원은 빚도 아니라고 하지만, 땅한 평 산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축사를 지은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투자한 것이 없는데 먹고 사는 데만 몇 천 만원을 뚝딱 빚을 졌다는 것이 때론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지지리 궁상을 떨고 살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딸이 조금 크고 나서 우리는 농사도 많지 않았기에 취업을 고민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에서 기혼여성이, 흔히 아줌마라는 이름으로 낮춰 불려지는 여성들이 갈 곳은 정말로 없었다. 여러 구인광고지를 전전하다가 어떤 입시학원에 면접을 갔었다. 면담을 하는 가운데 원장이라는 사람이 대뜸 그런다.

"이것 풀 수 있겠어요? 지금 여기서 한번 풀어보세요." 뭉개지는 자존심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이력서를 가지고 그곳을 나왔다. 바람이 몹시 부는 초겨울 날이었다. 그 후로 거의 취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다 우연히 다시 생활 정보지에서 학원강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았다. 다시 만난 원장은 오히려 아줌마들이 책임감 있게 잘한다고 굉장히 환영하는 눈치였다. 우선은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는 것이 너무도 고마웠다.

그렇지만 그것은 10시간도 넘는 수업에 온 몸을 혹사시키면서, 싼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받은 첫 월급이 내 인생 가장 많이 받은 월급이라는 생각이 나를 몹시도 슬프게 했다.- 나는 대학 졸업하고 바로 농민회 상근자로 일을 해서 월급보다는 쥐꼬리만한 생활 보조비라는 것을 받으면서 살다가 결혼을 했다.

그러나 그나마 나는 나은 편이었다. 전화로 가끔 통화하는 친구는 출산과 더불어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결혼 전에는 도시계획과 관련한 업체에서 일을 했는데 그곳은 아르바이트 일도 많이 주는 곳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크고 몹시도 일을 하고 싶은데도 아르바이트도 안 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조적으로 그런다. 결혼한 여자가 갈 곳은 식당밖에 없다고.

다른 대학 친구의 부인은 결혼 전에 잘 나가는 간호사였다고 한다. 수술실에서 일할 정도로. 그런데 거기도 마찬가지로 출산과 더불어 육아문제로 직장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근데 지금은 애도 어느 정도 크고 다시 일자리를 갖고 싶어도 갈 곳이 없단다.

대학병원들은 여기저기 있는 사람도 짜른 다고 난리고, 개인병원에서는 나이가 너무 많단다. 그 친구가 그런다. 너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이렇게 사는 내가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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