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운봉의 양묘장에서
남원 운봉의 양묘장에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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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따분하면서도 항상 끌어안기 벅찬 일들이, 그로 인하여 발생하는 여러 잡다한 것들이 나를 옥죄이는 가운데 도시의 변방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에게 편지를 쓰네. 갑작스런 편지에 걱정하지 말게. 돈을 빌리거나 혹은 보증을 서달라거나, 무엇이 성가셔서 넋두리를 하고, 술을 사달라거나, 이 밤을 찢어 버리자는 것은 아니니. 참 세월이 많이 흘렀네. 뜨거웠던 젊음으로 세상을 횡단하던 그런 세월이 한참 지나고 그대는 어느 변방에서 귀거래사를 꿈꾸며 수자리를 지키고 있고 나는 도심에서 철저하게 나와 싸우는 일을 하고 있는 셈인데 어찌된 일인지 요즘은 세상의 모든 것들을 정리하고 싶어 안달이라네. 심지어 밥을 먹는 것까지도 벗어날 궁리를 해 보는데 묘안은 아직 없다네. ©전고필

친구.
그대의 얼굴이 생각나던 어느 햇살 넉넉한 날 나는 전라도 운봉 땅을 찾았다네. 그대가 있는 곳으로부터의 거리를 생각하니 좀 멀다 싶어졌지만, 그대의 넉넉한 눈빛과 다부진 입술과 가끔은 뾰르퉁해질 때 지녔던 주름과 터져 나오는 입을 그대로 닮은 오래된 얼굴이 바로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라네.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은 바로 서천리 선두숲에 있는 두기의 장승이라네.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읍.
낯설기도 하겠지만 한번은 들어봄직한 이름일것이라 생각하네.
왜구들과 피의 접전을 벌였던 고려의 장군 이성계가 황산전투를 벌였던 곳이자 수많은 전화속에 쓰러진 넋들이 개꽃이 되어 능선을 덮고 있는 바래봉이 바로 운봉땅이라네.

그래도 생각나지 않는다면 춘향전에서 변사또의 생일잔치에 들른 남루한 차림의 이몽룡에게 개다리 소반에 나물 몇가지와 술을 건네고 그로하여 높을 高자와 기름질 膏자를 써서 시를 지어내게끔 했던 이를 생각해보게. 그이가 바로 운봉의 영장이라네.
이제 그대의 기억을 되살려냈는지 모르겠네.

©전고필

친구! 운봉에 들리거든 먼저 읍내로 진입하는 다리를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난 제방을 따라 200여미터를 걸었으면 좋겠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낙동강으로 흐르는 강줄기중의 하나임을 기억하면서 하늘거리며 춤을 추고 있는 코스모스 길을 걷다보면 서부지방 산림관리청 남원양묘사업소라는 곳이 있다네.

가을을 맞이하는 분주한 손길이 짬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묘목이 가지런히 식재되어 있는 길을 가다보면 그곳에서 우리에게 꿈이었던 산, 지리산에 자생하는 식물을 중심으로 111종이나 되는 나무를 만날 수 있다네. 흔하지 않게 만나는 전나무, 구상나무, 주목나무가 도열을 하듯 심어져 있어 일란성 쌍둥이의 얼굴처럼 비슷하지만 이곳 저곳 살펴보면 다른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하듯 그들의 나무 색깔이나 바늘 잎의 형태에 따라 구분하는 방법 또한 쉽게 찾아낼 것이라네.

6헥타아르에 달하는 이곳은 또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양묘장의 직원들이 정성으로 가꾼 야생화가 178종이나 있다네.
내가 찾았던 날은 옥잠화가 어찌나 곱던지 내 사랑하는 여인의 머리에 꼽아주고 싶을 정도로 욕심이 났다네. 거기 뿐인가. 야생화 자체를 염료를 체취 하는 종류와 식용과 향신류로 구분하여 심어 놓았으니 단지 꽃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식물의 용도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어 정말 기분이 너무 오졌다네.

©전고필

전체를 둘러보는데 성미가 급한 탓에 세시간 정도 밖에 못 있었지만 이렇게 우리의 소중한 꽃과 나무를 가꾸는 곳이 내 사는 땅에 인접하여 있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웠다네.
나이가 먹어 갈수록 더욱 우리의 나무와 풀에 관심을 가지는 자네에게 남원을 지나 해발 470m의 여원재를 넘어 평균고도 417m인 운봉 땅에 들려 서천리의 숲에 있는 그대의 얼굴과 저 어머니와 같은 지리산의 모유를 빨고 있는 남원 양묘장에 꼭 들려보라는 말로 내 장황한 사설을 마치겠네.

나는 이제 나의 길이 시들어지는 것을 느꼈나 보네. 스스로 깊이 침잠하여 내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꽃과 나무를 키우면서 깨달은 바 있거든 그때 다시 연락함세. 부디 나를 찾지 말아주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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