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의 힘, 소설의 힘
마술의 힘, 소설의 힘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9.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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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조구호 역, 민음사)

마술적 리얼리즘.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이토록 모순적일 수 있을까. 그러나 이 어구는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에 대해 얘기할 때면 반드시 등장하는 어구다. 판타지 소설에나 어울릴만한 '마술적'이란 말이 어떻게 리얼리즘을 표방하고 나선 작품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쓰일 수 있단 말인가?

나를 더 놀라게 한 사실은 자칫 '판타지'로 오인 받을 수도 있을 이 작품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더불어 20세기 문학의 2대 소설로 꼽히며, 198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소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의문과 놀라움을 안고 나는 마르께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어나갔다. 그런데 일단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하자,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소설이 나에게 안겨주는 유쾌한 웃음 때문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책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마술적인 수많은 사건들과 광경들은 유쾌한 웃음을 유발하는 일등공신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이 마냥 유쾌한 환상으로만 도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태고의 한 지역에 '마꼰도'라는 마을이 설립되고 번영하고 시련을 겪고 몰락하기까지의 역사가 그 마을을 세운 지도자 격인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되는데, 이들의 피할 수 없는 죽음과 근친상간의 운명을 서술하는 부분에서는 '장엄한 슬픔'이라 부를만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또한, 나는 소설을 읽어 나가는 동안 어느 새 처음에는 이름조차 외우기 힘들었던 소설 속의 인물들과 친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엉뚱한 이웃 할아버지처럼,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멋진 영웅의 풍모를 지닌 할아버지처럼 여겨졌고, 쌍둥이인 세군도 형제는 철없는 삼촌처럼, 미녀 레메디오스는 순수한 만큼 더욱 정감이 가는 예쁜 사촌누이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들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잠시 책을 덮고 짧으나마 애도의 묵념을 한 뒤에 책을 다시 펴기도 했다. 나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도록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마술적인 사건들들에 매혹되다

이 소설 속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사는 거시적 차원에서 서술되어지지 않는다. 한 작은 마을, 그리고 그 마을에서도 한 집안을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들이 서술된다. 이러한 점은 이 소설의 다른 많은 장점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인 바, 거시적 차원에서 기술된, 교과서에 실린, '공인된' 역사와는 다른 역사가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을 통해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파업을 주동하다 죽을 위기를 넘긴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는 파업을 진압하는 군인들이 3천명을 학살했다고 기억하는데, 다른 이들은 정부의 공식 발표를 근거로 이 말을 전혀 믿지 않으려 한다. 물론 실제로 13명이 죽었는데 3천명이 죽었다고 말하는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의 기억 역시 사실은 아니지만, 그의 과장된 기억은 그 당시 시위진압 현장의 격렬한 감정을 그대로 전달해주는 효과를 가진다.

이러한 점은 이 소설을 규정하는 수식어인 '마술적'이라는 형용사가 그 의의를 드러내는 지점을 가리키기도 한다. 마술은 현실을 과장한다. 따라서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에, 현실을 과장하는 마술적 기법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무미건조한 사실의 나열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호홉과 체취와 흥분과 열정의 집합체로서 경험하게 만든다.

살아있는 역사, 역사의 산 증인이란 말을 우리는 쓰는데, 이 소설 속에서 부엔디아 가문의 구성원들 각자는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의 산 증인들이다.
이 때문에 이 가문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최후를 맞을 때마다 나는 장엄한 슬픔을 느끼며 잠시 책을 덮고 묵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가상'으로서의 소설

지금까지 소설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하나의 주된 목표로 삼아왔다. 때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또 때로는 현실의 이상적인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는 차이는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요즘 판타지 문학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백년의 고독」에서 사용된 '마술'을 보고 나서, 나는 소설이 근본적으로 '가상'이라는 아주 단순하고도 자명한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껏 (리얼리즘) 소설이 주로 해왔던 현실 반영의 노력이 자신의 근본을 망각한 주제 넘는 행태는 아닌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인간을 인간이게끔, 문학을 문학이게끔 해주는 것은 바로 상상력이다. 왜 우리는 지난 오랜 세월동안 이 '상상력'의 영역을 마치, 분명히 존재하지만 한번도 직접 본적이 없다는 이유로 존재자체를 무시당하는 달의 뒷면처럼 여기면서 살아온 것일까.

주범은 아마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한 서양 문명일 것이다. 이 문명은 이미 전세계에 빈틈없이 스며들어 그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는 것(인식 가능한 것)만을 곧 진실로 여기는 '눈의 콤플렉스'를 깨고, 이성이 만들어 낸 근대적 질서에서 탈피하여, 태고적 질서에 대한 (아도르노적 의미에서의) '미메시스'를 수행하는 「백년의 고독」의 발견은 의미심장한 수확임에 틀림없다.

※ 영화 <오아시스>는 「백년의 고독」과 많이 닮았다. 지면 관계상 이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할 수는 없고, 다만 <오아시스>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백년의 고독」을, 「백년의 고독」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오아시스>를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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