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1회]-순천 왜교성 전투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1회]-순천 왜교성 전투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2.08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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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9월 11일에 명군 2만 2천 명, 조선군 6천 명으로 이루어진 서로군은 전주에서 출정식을 가졌다.

검단산성 입구
검단산성 입구

남원에 도착한 서로군 제독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함께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작전계획을 짰다. 그리고 고금도에 있는 진린과 이순신에게도 작전계획을 시달했다.

그런데 고니시가 먼저 유정에게 편지를 보내어 강화(講和)하자고 하였다. 고니시의 편지를 읽고 유정은 희색이 만면하였다.
하지만 수행한 우의정 이덕형은 유정의 고니시 생포 작전에 우려를 표시했다.

9월 19일에 유정과 권율은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순천 부유현(富有縣)에 도착하였다.
9월 20일은 유정과 고니시가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유정은 병사들을 미리 매복시킨 후 기패관(旗牌官) 왕문헌과 우후(虞候) 백한남을 각각 유정과 권율로 속여서 회담 장소로 보냈다.

고니시는 부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회담 장소로 향했는데, 명나라 군사가 실수로 미리 대포를 쏘아 버렸다. 고니시는 자신을 죽이려는 술책임을 눈치채고 재빨리 돌아가 버렸다.

겸연쩍은 유정은 당장 공격을 개시하였다. 조명군은 왜성 밖 7-8리 지점까지 진격하여 싸웠고, 조명 수군도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이러자 왜군은 기세가 꺾여 두려워하는 모습이 가득하였다.

9월 20일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오전 8시에 광양 땅 유도에 다다랐더니 명나라 육군 제독 유정이 벌써 병력을 이끌고 왔다. 수륙으로 협공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였다. 수군이 드나들며 대포를 쏘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조명수군이 광양만 해상전략의 요충지인 장도를 장악한 일이다.
장도는 남해로 통하는 관문이자 왜교성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수군 기지였다. 따라서 조명연합수군은 고니시 왜군의 해상진출을 초전에 봉쇄했다.

이 날 유정은 순천 왜교성에서 1.5km 정도 떨어진 검단산성에 진을 쳤다.

9월 20일부터 시작된 순천왜교성 전투 규모는 이렇다.

명나라 유정이 지휘하는 육군은 이방춘, 조희빈, 오광, 우백영, 남방위 등 21,900명, 조선군은 전라병마사 이광악, 전라도 방어사 원신등 5,928명이고, 수군은 진린의 명군이 19,400명, 이순신의 조선군이 7,328명이었다. 왜군은 고니시 유키나가, 마쓰라 시게노부, 아리마 하리노부, 고토 가문, 오무라 가문등 14,000명이었다.

9월 21일에도 유정은 왜교성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공격 강도는 약했다. 조명수군은 아침에 진군하여 하루종일 싸웠으나, 물이 매우 얕아서 가까이 다가가 싸울 수가 없었다.

22일에도 조명연합수군은 공격하였는데 명나라 유격 계금이 왼편 어깨에 탄환을 맞았고 군사 11명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지세포 만호와 옥포만호도 총상을 입었다. 그런데 유정의 육군은 싸우는 것도 아니고 안 싸우는 것도 아닌 어영부영이었다.

9월 23일 이후 유정은 왜교성 전투를 중지하였다. 공성전을 펼칠 사다리를 준비한다는 핑계였다.

9월 말이 되자 이순신이 진린에게 항의하였다.

“기약 없이 마냥 기다려야 합니까? 거취를 분명히 해주시지요.”
이러자 10월 1일에 진린은 검단산성으로 유정을 찾아갔다. 유정이 먼저 선수를 쳤다.

“마침 잘 왔소. 그렇지 않아도 사람을 보내려는 참이었는데. 내일 오전 6시를 기해 총공격을 할 것이요. 진도독도 어김없이 그 시각에 공격하여 주시지요.”

10월 2일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수군은 해상에서 적극 공세를 펼쳤으나 육군은 여전히 소극적이었다.

이 날의 전투를 보고한 이순신의 치계를 살펴보자.

"2일 수군이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하였는데 (왜군은) 육군이 바라만 보고 진격하지 않음을 알고서 수군을 치기에 전력(專力)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혈전(血戰)하니 왜적의 시체가 언덕 밑에 낭자하게 흩어져 있었으며 혹은 서로 적치되어 있었습니다.
우리 군사 중에 탄환을 맞아 죽은 자는 29명이고 중국 군사는 5명입니다."(선조실록 1598년 10월 13일 3번째 기사)

그랬다. 이날 전투에서 육군을 지휘한 명나라 유정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10월 3일에 진린은 유정의 밀서를 받고 초저녁에 나가 자정이 될 때까지 싸웠다. 명나라 함대 300척이 공격했는데 조수 시간을 놓친 진린 휘하의 사선(沙船) 19척과 호선(唬船) 20여 척이 갯벌 위에 갇혔다가 왜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안골포 만호 우수도 탄환에 맞았다.

이 날도 유정은 팔짱만 끼고 있었다.
왜인들이 놀라고 당황하여 모두 동쪽으로 갔으니 만약 서쪽에서 공격하여 들어갔다면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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