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5회]-명량대첩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5회]-명량대첩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15 19: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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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대교
진도대교

1597년 9월 15일에 이순신은 진영을 진도 벽파진에서 해남 전라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이순신은 즉시 휘하 장수들을 소집하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먼저 그는 일장 연설을 하였다.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必死卽生 必生卽死)’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 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 두 마디 말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대들은 이번 전투에서 살고자 하는 생각을 품지 마시오.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군졸들도 뒤를 따를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요”

칠천량 전몰이후 부하 장수들이 왜적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은 정신 승리부터 강조했다.

이날 밤 이순신은 또 꿈을 꾸었다.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여차여차하면 크게 이길 것이요 여차여차하면 패배할 것이라’고 하였다.”
얼마나 노심초사하였으면 꿈에도 전투 작전 구상이 나타났을까?

그러면 명량해전을 살펴보자. 이는 9월 16일의 ‘난중일기’에 그대로 실려있다.

“ 9월 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탐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수효를 셀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 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스스로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모두 회피할 꾀만 내고 있었다.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이미 2마장(800m) 밖에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총통 등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왜군에게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헤아릴 수 없으니,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라’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400m 정도)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배를 돌려 바로 중군 김응함의 배로 가서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지만,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더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招搖旗 대장이 장수를 부르는 깃발)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 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직접 안위를 불러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군법에 죽고 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하였다. 그러자 안위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뛰어들었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고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면할 것이냐? 처형하고 싶지만 전세가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하였다.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두 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올라가려 하였다.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철못을 박고 쇠줄고리를 단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적을 쏘아 죽여 왜적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왜인 준사는 이전에 안골포의 적진에서 투항해온 자인데, 내 배 위에 있다가 바다에 빠져 있는 적을 굽어보더니, ‘그림 무늬 비단옷을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물 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낚아 올렸더니, 준사가 펄쩍 뛰면서 ‘정말 마다시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곧바로 명령을 내려 토막토막 잘랐더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울려 함성을 지르면서 쫓아 들어갔다. 지자, 현자총통을 쏘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았다.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도망가고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싸움하던 바다에 그대로 정박할까 싶었다. 그러나 물결도 몹시 험하고 바람도 거꾸로 불어서 우리 편의 형세가 외롭고도 위태로운듯 하여 당사도(무안군 암태면)로 옮겨가서 밤을 지냈다.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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