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3회]-직산 전투와 왜군의 전라도 점령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3회]-직산 전투와 왜군의 전라도 점령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25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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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곧장 전주로 향하였다. 전주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진우충은 남원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받자마자 줄행랑쳤다.

교토의 코무덤

8월 18일에 고니시의 좌군이 전주에 무혈 입성했고, 24일에는 가토의 우군도 전주에 들어왔다. 8월 25일에 왜장들은 전주에서 회의를 하였다.

회의 내용을 살펴보자.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전라도를 공격한다. 모리 히데모토 ·가토 기요사마 · 구로다 나가마사의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하여 경기도를 목표로 하며, 좌군 중 우키타 · 고니시는 군대를 남쪽으로 돌리고, 시마즈 등은 전라도의 좌로를 따라 내려가면서 여러 고을에 분산 주둔한다.

(기타지마 만지 지음, 김유성·이민웅 옮김,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p 203)

9월 3일에 가토 기요사마는 공주를 점령하고 천안으로 진군하였다. 모리 히데모토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이미 전의, 진천에 이르렀다.

이러자 서울의 조정은 다시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선조는 황해도 해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고, 연거푸 사신을 보내 평양에 있는 명나라 경리(최고 지휘관) 양호에게 명군의 출동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9월 3일에 서울에 온 경리 양호는 압록강으로 후퇴하려는 제독 마귀를 꾸짖고 부총병 해생· 참장 양등산· 유격장 우백영과 파귀에게 용맹한 군사 8천 명을 거느리고 왜군을 치라고 명령했다.

9월 6일에 명군은 야음(夜陰)을 틈타 은밀하게 천안 방면으로 출동하였다.

9월 7일 동틀 무렵에 명군은 직산 근처 금오평(金烏坪)에 도착하여 왜군을 덮칠 계획을 세웠다.

이때 구로다 부대가 금오평에 이르렀다. 명군은 왜군이 전투준비를 하기도 전에 세 갈래로 나누어 왜군을 공격했다. 연달아 대포를 쏘고 말을 달려 돌진하니 왜군은 혼비백산하였다. 이날 명군과 왜군은 6차례나 맞붙어 싸웠는데 명군의 판정승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명군과 왜군은 모두 휴식을 취하였다. 이 날 밤 왜장 가토는 여러 장수들에게 내일 아침에는 결사적으로 싸우도록 명령하였다.

명나라 장수 해생은 비밀리 장수들에게 명령하였다.

“오늘 왜적의 형세를 보니 적은 내일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니 죽음을 걸고 용감하게 싸우라. 그리고 왜적은 교활하니 패하여 물러가게 되면 반드시 산길로 갈 것이다. 험한 곳에서는 명나라의 기병과 왜군의 보병은 형세가 다르니 끝까지 추격하지는 말라.”

다음날 먼동이 틀 때 왜군은 일제히 포를 쏘며 진군하여 오는데, 살기(殺氣)가 하늘까지 뻗쳐 명군의 눈을 아찔하게 하였다. 이러함에도 명나라 기병들은 왜군에 맞서서 철퇴를 휘둘러 치니 왜군은 모두 줄줄이 쪼개지듯 하였다.

더구나 유격 파새가 거느린 2천 기병까지 가세하여 싸우니 왜군은 패하여 목천·청주 쪽으로 달아났다. 명군은 왜군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 왜군의 점라도 점령

8월 24일의 전주 회의 결과에 따라 일본 좌군의 우키다 히데이에와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실, 구례를 거쳐 9월 1일에 순천에 도착하였다.

고니시는 먼저 방문(榜文)을 길거리에 내걸고 왜군 적대 세력 색출작업부터 벌였다. 관리들의 집에 방화를 권장하고, 은신처를 신고한 자는 포상한다고 한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 백성들을 갈라치기 했다.

이어서 고니시는 순천에 왜교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순천지방 부역자들을 앞잡이로 삼아 인부를 동원하였다. 이리하여 왜교성은 불과 3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사단법인 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정유재란과 왜교성 전투, 지웅, 2014, p 30-31)

한편 시마즈의 좌군은 방화와 약탈, 살인과 코베기를 하면서 9월 16일에 정읍에 닿았다. 이들은 회의를 열어 전라도 각 지역에 분산하여 주둔할 것을 결정했다. (기타지마 만지 지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 p 207-209 )

정읍 회의 후 시마즈는 장성, 나주, 영암, 해남을 내려가면서 전라도를 초토화했다. 시마즈는 9월 27일부터 10월 13일까지 해남에 머물렀다.

시마즈 휘하 왜군들은 순창, 담양, 광주, 화순등 50개 군현에 촘촘하게 주둔했다. 왜장 요시라(要時羅)는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곡성에 주둔했다.(조경남의 ‘난중잡록’)

왜군은 야만적인 살상과 납치, 약탈과 방화 그리고 코베기를 자행하였다. 코베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지시였다. 왜장들은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통으로 보냈다. 9월에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금구와 김제에서 취한 코 3,369개를 히데요시에게 보냈는데 접수증명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영광과 진원(장성군 진원면)에서는 1만 40개의 코가 히데요시에게 보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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