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2회]-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2회]-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9.21 11: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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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8월 14일 오후에 이순신은 보성에 이르러 열선루(列仙樓 보성군 관아 뒤에 있는 누각)에서 잤다.
밤에 비가 몹시 내렸다.

열선루 (보성군 소재)
열선루 (보성군 소재)

8월 15일에 이순신은 열선루에서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온 선조의 유지를 받았다. 8
월 7일에 작성된 선조의 유지는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수군을 폐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이순신은 곧바로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라는 장계를 작성했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 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순풍에 돛을 달듯이 다행한 일로 왜적은 호남과 충청연해를 거쳐 단번에 한강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저의 전선 수가 적다하나 보잘것 없는 신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 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수군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선조의 어명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이순신은 이 날의 일기 끝에 ‘과음해서 잠들지 못했다.’고 적었다.

# 남원성 함락
추석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우키다 히데이에가 총지휘하는 5만6천 명의 왜군이 남원성을 함락시켰다. 명나라 총병 양원과 전라병사 이복남이 이끄는 4천 명의 조명 연합군은 3박 4일간 치열하게 싸우다가 전멸당했다.

8월 초에 일본 육군과 수군이 남원으로 진격했다. 총대장은 우키다 히데이에, 선봉장은 고니시 유키나가이고, 장수들은 시마즈 요시히로·하치스가 이에마사 등이었다. 도도 다카도라·와기자카 야스하루·가토 요기아키가 이끄는 일본 수군도 합류했다. 8월 8일에 명나라 총병 양원은 전주성을 지키는 명나라 유격 진우충과 전라병사 이복남에게 남원성으로 들어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진우충의 군사는 2천 명, 이복남는 1천 명이었다.

8월 10일에 총병 양원은 남원부사 임현으로 하여금 교룡산성(蛟龍山城) 안에 있는 가옥을 모두 불사르게 하고 남원성 밖의 민가도 전부 불태우게 하였다. 접반사 정기원과 남원 부사 임현이 교룡산성을 지켜야 한다고 양원에게 건의하였지만 양원은 비웃으면서 교룡산성을 버렸다. 양원의 교룡산성을 포기는 하책(下策)중에 하책이었다.

8월 12일에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교룡산성 별장 신호 등이 장사 50명과 수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남원성으로 들어왔다.

한편 전주에 있는 진우충은 아예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어이없는 일은 갓 부임한 전라도 관찰사 황신이 전주 감영에서 부안군 변산으로 피신한 것이다.

그러면 남원성 전투 상황을 살펴보자.

8월 13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명나라 총병 양원이 지휘하였다. 양원은 이신방과 함께 동문에, 장표는 남문에, 모승선은 서문에, 전라병사 이복남은 북문에서 성을 지켰다. 왜군은 남문은 우키다, 서문은 고니시, 동문은 하치수, 북문은 시마즈가 공격을 맡았다.

오후 2시에 왜적 수만 명이 성 밖 백 보쯤에 와서 총을 쏘고 고함쳤다. 성안에서는 진천뢰를 쏘았다. 그러자 왜군이 많이 다치고 퇴각하였다.

8월 14일
아침부터 왜군은 성 밖에서 이전보다 두 배나 많은 인원으로 토목공사를 시작하였다. 또한 민가의 담벽을 뚫어서 총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성안을 굽어보면서 조총을 쏘니 명나라 군사가 많이 죽어 동남쪽 성가퀴가 텅 비었다.

낮 12시 무렵에 왜군은 큰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였는데 포 소리가 천지에 울렸다. 서문 앞에 있던 왜적은 만복사의 사천왕상을 수레에 싣고 와서 성 밖에 돌며 시위하는 심리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왜군이 집요하게 공격하자 양원은 화가 나서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고 나가서 싸웠는데 적이 퇴각하므로 돌다리 밖에까지 쫓아나갔다. 잠시 후 왜군은 문밖에 잠복해 있다가 포위하려 하므로 양원은 나팔을 울려 급히 성으로 돌아왔다.

8월 15일
왜적들은 성 밖에서 잡초와 벼를 베어 묶으며 크게 단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때 고니시가 보낸 왜군 5명이 양원을 찾아왔다. 양원은 왜군을 접견하였다. 왜군은 양원에게 성을 비우라고 하였다. 양원은 단번에 거절했다.

이날 밤늦게 왜군은 짚단으로 참호를 메우고 풀 단을 쌓았다. 그것은 성보다도 더 높았다. 조금 있다가 수많은 왜군들이 풀 단을 딛고 성 위로 올라왔다. 성안은 아수라장이었다.

8월 16일

왜군은 새벽 2-3시 경에 남문과 서문으로 뛰어 들어와 명군과 조선군을 마구 죽였다.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북문으로 달려갔다. 양원은 5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나왔다. 왜군이 쫓았지만 양원은 4, 5마리의 말을 한꺼번에 몰면서 어렵사리 성을 빠져나갔다.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정말 잔인하였다. 산하를 불태우고 사람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었다. 종군 승려 케이넨은 8월 16일자 『임진왜란 종군기』에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다. 알 수 없는 이 세상살이, 모두 죽어서 사라지는구나.”라고 기록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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