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0회]-이순신,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0회]-이순신,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8.29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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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7월 18일 새벽에 이순신은 도원수진 합천에서 칠청량 패전 소식을 들었다.
그는 통곡했다. 조금 있다가 도원수 권율이 이순신을 찾아왔다.

손경례의 집 (진주시)
손경례의 집 (진주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권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일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자 이순신은 “내가 해안지역으로 가서 직접 보고 듣고 한 후에 대책을 세우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권율은 매우 반가워하며 승낙하였다.
이순신은 지체 없이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 군관 9명과 함께 길을 떠났다.

7월 21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이르렀다. 이 날의 ‘난중일기’이다.
“ (...) 점심을 먹은 뒤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 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이 그에게 와서 통곡하였다. 또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도 울부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 우후 이의득이 보러왔기에 만나서 패한 상황을 물어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원균이 적을 보자 먼저 육지로 달아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그를 따라 육지로 달아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원균의 잘못은 말로 다 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 하였다.
거제 소속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와 새벽 2시까지 이야기하였다.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해 눈병을 얻었다.”

7월 22일 아침에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순신을 보러 왔다. 배설은 이순신에게 원균이 패하여 죽은 사실을 장황하게 말하였다.
이 날 선조는 비로소 칠천량 패전 보고를 받고 이순신을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했다.

23일 아침에 이순신은 공문을 작성하여 송대립에게 주어 합천의 권율 원수부에 보냈다.

27일에 이순신은 손경례의 집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진주목사·남해현령 등과 대책을 논의하면서 6일간 머물렀다.

8월 3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선전관 양호로부터 교서(敎書)와 유서(諭書)를 받았다.
교서의 제목은 '기복(起復) 중에 3도 통제사를 임명하는 교서(起復授職 三道統制使 敎書)'이다. (기복이란 원래 어버이의 상중에는 벼슬길에 나서지 않는 것이 조선의 예법인데, 관례를 깨고 벼슬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다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도를 이미 잃어 버렸으니 왜적들이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 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1592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 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무슨 말을 하리오! 더 무슨 말을 하리오!

이제 짐은 그대를 상복 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 지어다. (후략)”

이순신은 숙배를 한 뒤 삼가 받았다는 서장(書狀)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바로 전라도로 향했다. 수하에는 군관 9명과 졸병 6명뿐이었다.

이순신이 광양 두치를 거쳐 구례 석주관(구례군 토지면)에 이르자, 구례현감 이원춘이 복병하고 있다가 이순신을 보고는 적을 토벌할 일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날이 저물어 이순신은 구례현에 머물렀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50회 이순신, 다시 삼도수군 통제사가 되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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