냇가에 앉아서
냇가에 앉아서
  • 문틈 시인
  • 승인 2023.08.26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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냇가에 앉아서 조용히 흘러가는 물소리를 듣는다. 엊그제 비가 온 뒤라 징검다리를 덮을 만큼 물이 불어나 물소리가 한결 거세다. 이 골물 저 골물이 합쳐서 냇물은 속살거리며 먼 바다를 향하여 줄달음친다.

흐르는 물결 소리를 하염없이 듣고 있노라니 절로 마음이 정하게 된다. 물결들은 산골짝에서 흘러오거나 실개천에서 혹은 어느 들판을 휘돌아 오거나 해서 마침내는 냇물로 모여 흘러간다. 물결들은 저마다 자기가 흐르며 지나온 곳들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품고 흐른다.

물결들이 내는 소리는 어쩌면 물결들이 품고 온 이야기들을 서로 들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암만 들어도 그 이야기들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다만 짐작할 따름이다. 시내를 줄기차게 흘러가는 물결들은 죄다 길고도 짧은 이야기들을 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사람과도 흡사하다.

사람도 모두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 이야기들이 있다.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들에 엮여 있다. 그 이야기를 일평생 이어가며 살아간다. 냇물은 목적지를 아는데 사람들은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을까. 목적지가 있기나 한 것일까.

냇물은 강으로 흘러든다. 강물에 섞여 구비쳐 흐르다가 마침내는 목적지인 바다에 당도한다. 세계의 모든 냇물은 무한의 바다로 흘러간다. 모든 물결은 바다로 가서 설레는 마음들끼리 하나가 될 것이다. 구비치고, 휘돌고, 여울지고, 온갖 피치 못할 굴곡진, 평탄한, 거친 경험의 긴 여정 끝에 바다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긴 이야기들을 품고 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요즘 나는 마음이 울적하다. 책도 손에 안잡히고 만사가 시큰둥하다. 가만히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니 그치지 않는 묻지마 살인 사건,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어지러운 여야의 정쟁, 다시 유행하는 코로나 변종 등 여러가지 시끌사끌한 문제들이 내 심사를 옥죈다. 그래서 속이 답답하고 불편하다. 살짝 화도 나 있다.

냇가에 앉아서 물결의 흐름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그런 슬프고, 화나고,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금세 다 잊혀진다. 물소리는 잠잠하라고, 내버려 두라고, 그들의 경험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나를 위로해 주는 것 같다.

여기서 문득 조선시대 왕방연(王邦衍)이 떠오른다. 그는 세조의 명을 받들어 사약을 들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 단종에게로 간다. 단종은 복위사건에 휘말려 영월에 유배되어 죄인으로 살고 있다. 의금부도사 왕방연이 단종 앞에서 쭈뼛거리니까 단종이 말한다.

“네가 할 일을 어서 말하라.” 왕방연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옆에 있던 공생(貢生)이 사약을 가져왔음을 알리자 단종은 시종에게 의관을 갖다 달라 해서 관과 곤룡포를 입고 임금을 향해 절을 하고는 태연히 사약을 마신다.

왕방연은 아무리 임금의 명을 수행할 뿐이라고는 하지만 단종이 사약을 마시고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너무나 괴로웠다. 돌아오는 길에 냇가에 앉아서 하염없이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보며 울적한 심사를 시조 한 수로 읊었다. 그 유명한 시조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이 시조를 읊조려보니 가슴은 에이고 저며든다. 왕방연은 그 길로 관복을 벗고 한양 왕십리에서 두부 장사를 하며 초야에 묻혀 여생을 보냈다 한다. 그 마음 나도 알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노라니 냇물 소리는 마치 울음 우는 소리처럼 들린다.

시내를 흘러가는 물결 소리는 어느 먼 곳에서 달음질쳐 오는 여정에서 때로 바위에 부딪치고, 때로 폭포에서 떨어지고, 때로 갇혀 있기도 하는 갖은 수난을 당한 아프고 슬픈 내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도 그가 아무리 권세가 있고, 부자고, 잘 났다 한들 슬픔과 안타까움이 짝지어 일생을 엮어온 여정이 아니던가. 나는 사람을 가리켜 ‘슬픈 이야기’라고 부른다. 저기 슬픈 이야기가 하나 온다, 간다.

시냇물은 가는 목적지가 있지만 사람은 향할 목적지가 없다. 나는 그 안타까움을 찾아 일생 동안 헤매었다. 뉘라서 냇물 흐르는 것을 보고 덧없다 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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