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와의 오래된 인연-강진병영
네덜란드와의 오래된 인연-강진병영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7.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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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년 전 하멜 표류의 흔적은 전설이 되어...
빗살모양 석축 병영 수로 네덜란드 식이라는 설도
병영 가는 길섶 무지개다리 신분 초월한 사랑이야기>


월드컵이 거대한 열풍으로 한반도를 휩쓸 무렵 축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도 어느 사이 축구를 좋아 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다음주에 게재할 여행관련 기사를 어느 곳을 택할 것인지에 자꾸 관심을 기울였다.

결국 나는 그 숙제를 텔레비전을 보다가 해결하였다. 틈만 나면 클로즈업 된 네덜란드 출생 거스 히딩크 감독의 화면에서 나는 전라도 강진의 병영을 떠 올렸던 것이다.

그곳은 히딩크 감독의 조상과 역사가 잇닿아 있는 몇 안 되는 곳인데다 피 어린 항쟁의 역사와 한국인의 정서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전라도의 조명 받지 않은 그러나 꼭 조명을 받아야 할 숨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중 히딩크의 조상과 관련된 역사를 살펴보면 바로 조선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하멜이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7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유교의 서슬이 아직은 시퍼렇기도 했지만 신문물에 대한 호기심도 동했던 조선 효종 4년인 1653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에 소속된 23살 먹은 하멜은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대만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끼 항을 향해 가다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고 결국 파도에 떠밀리어 제주도의 모슬포쪽으로 상륙을 하였다.

주민들에게 발각되어 관아로 압송되어 제주목사의 심문을 받고 감금이라는 정신적 육체적 속박을 당하였다. 뒷날 먼저 이곳에 표류하였다가 귀화한 박연의 통역에 의해 그가 상업을 위해 일본을 가던 길에 이런 참사를 만난 것이라 밝혀졌지만 상륙한 외국인은 다시는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는 법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고 다시 전라도 쪽으로 이송되면서 1656년 하멜은 이곳 병영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7년여의 기나긴 시간동안 11명의 동료를 잃고 22명의 동료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신진문물을 이곳에 전해 주기도 하고, 모두가 힘들었을 때에는 거리에 나가 동량을 하면서 살았던 것이 하멜의 인생이었다.
결국 몇 년간의 기근에 의해 분산수용되어 전라 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이첩되었을 때 하멜은 꿈에도 그리던 고국을 향해 8명이 탈출을 시도하여 1666년 9월 일본에 도착하고 다시 그곳으로 보내어진 7명과 함께 1667년 네덜란드에 안착을 한 것이다.

▲참 나쁜 도둑입니다. 세상에 한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자기 집 정원으로 혹은 외국으로 팔아 넘기려 하다니요. ©전고필

하멜은 조선에서 보낸 14년간의 생활을 그가 소속된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 형식으로 제출을 하고 그것이 하멜표류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드러남으로서 조선이라는 국가가 유럽에 알려지게 된 계기를 맞은 것이다.

이런 병영에는 그가 살았던 유형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성동리라는 마을에 있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600살 먹은 은행나무가 그때 이방인 겪은 고충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란 얘기가 흘러오고 있으며, 이웃한 방촌 마을의 존재 위백규 같은 이가 70년이 지난 뒤 세계지도가 나오게된 데에는 바로 하멜 일행들의 세계에 대한 지리적 개념들이 전달되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추측도 존재하고 있다.

바로 남만인(당시 네덜란드 사람을 이렇게 불렀다고 함)이 호남의 실학파들에게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실증하고자 하는 학설이고, 특이한 것은 다른 지역의 돌담에서 쉽게 보지 못하는 빗살 모양의 석축 방법이나 병영의 수로를 활용한 형태들이 네덜란드 식이라는 얘기들이 남아있다.
아직 이렇다할 흔적을 발견하고 있지 못하지만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이룩한 히딩크에 대한 사무치는 고마움을 절절히 안고 있는 이 땅에서 그와 관련된 것이라면 조그만 실오라기 하나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하멜의 역사와 흔적을 재조명하며, 네덜란드와 한국의 관계까지도 재매락화하며, 이를 병영 관광의 새로운 전기로 만들 필요성 또한 크다고 하겠다.

비단 한순간의 유행이 아니라 병영에는 앞서 말했듯이 흔적을 찾지 못하는 하멜의 혼이 있기도 하지만 조선 태종때부터 광주에서 이설된 전라병마도절제사영을 따라 조성된 병영성과 이로 말미암아 갑자기 커져나 한수북쪽에는 개성 상인이라면 한수이남에는 병영 상인이라 했던 병영사람들의 상업적 기질과 그를 승계한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성실한 모습 또한 보기에 넉넉하고 그들이 만들어 주는 음식 또한 값싸면서도 전라도의 맛을 고스란히 전해 주어 또한 행복한 나들이가 된다.

게다가 대부분의 무지개 다리가 사찰의 초입에 서 있는데 반해 이곳 병영홍교는 병영성을 향해 가는 길섶에 없는 듯 조용히 자리잡고 있어 더욱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얘기를 조금 살펴보면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얘기가 이 다리를 만드는 동인으로 김씨 집안의 머슴인 유씨 성을 가진 총각은 본시 양반 가문이 몰락하여 이렇게 머슴을 사는데 훤칠하고 영리한 친구였다고 한다. 물론 김씨 집안에는 어여쁜 외동딸이 있어야 얘기는 진행되는 법,

어느 화창한 날 머슴은 나무하러 산에 가고 김씨 처자는 나물 캐러 갔다가 갑작스럽게 내린 험악한 비가 둘을 소나무 아래로 모이게 하고 그래서 둘은 흠모하던 마음을 서로 나누었다고 한다. 그들 사이에 유한계라는 아들이 태어났는데 나중에 그가 정승이 되어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하여 74개의 돌을 놓아 홍교를 만들었다고 전하며, 다리 입구에는 두기의 장승이 서 있다.

'84년 도난을 맞아 다시 세워둔 것이기는 하지만 원형을 살려 세워서 제주의 돌하르방과 견주어 비교해 보면 장승의 또 다른 형태를 알 수 있게 하는 아쉬운 현대유적까지 만날 수 있다.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으니 바다가 있는 강진을 찾으려거든 반드시 한국의 축구를 세계에 알린 히딩크의 조상으로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린 하멜이 머물다 가고, 신분을 뛰어 넘어 사랑의 기적을 이룬 김씨 낭자와 유씨 총각의 사랑의 결실이 낳은 홍교를 건너보고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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