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말
영혼의 말
  • 문틈 시인
  • 승인 2022.10.20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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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택시를 탈 때면 가끔 “고향이 어디세요?”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택시 기사는 목적지를 대는 내 말투에서 남도의 억양이나 말투를 금방 알아채는가 보다. “남도인데요.” 나는 거기서 끝내려고 한다.

가령 목포라든가 하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지명을 말하면 그 다음부터 택시 기사는 계속 말을 이어가고 너무 말이 길어져 목적지까지 이르기도 한다. “거기는 삼합이 맛있지요.” 자기도 영암이 고향이라는 둥.

나는 내 말투에 고향말의 말투가 남아 있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남도가 고향인 사람이 자기 고향의 말투를 조금이나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도 부끄럽거나 어색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고유한 표식이다.

내가 의도적으로 고향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내 깐엔 서울살이 30년이 훨씬 넘은 경력이 있어서 내 말투에 고향 어투가 사라진 것이나 아닌가 싶은데 다행히도 남도 출신들은 용케 내 말의 토씨나 종결어에 스며있는 남도 말을 콕 짚어낸다.

고향의 말이란 아무리 타향살이를 오래 했다고 해도 지워지지 않는 자국 같은 것인가 보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아들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의 말에서 자주 ‘했죠, 잉’소리를 듣는다며 나를 놀리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되게 ‘잉’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가 싶다. 바로 그 ‘잉’에서 내가 남도 사람임을 알아보는가 싶다.

‘잉’은 상대의 동의를 구하는 말같기도 하고, 상대에게 내가 다짐을 하는 말, 내가 하는 말을 강조하거나 상대의 확인을 바라는 말, 애틋한 정을 표하는 말, 하여튼 다양한 뉴앙스를 갖는 말이다. 나는 남도의 말 끝에 따라붙는 ‘잉’이라는 말을 남도 말의 귀한 특산품으로 친다.

‘잉’에 스며있는 그 깊고 한없는 정겨움을 뉘라서 무슨 뜻이라고 다 말할 수가 있으랴. 그 한마디 말에는 남도 사람의 독특한 향기가 스며있다. 그 말은 남도 사람의 영혼의 말이다. 속된 말로 사투리(라는 말을 나는 가장 싫어하지만)라고 내칠 수 있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만일 ‘잉’이라는 말을 내친다면 남도 사람들을 지역 차별하는 것과 같다. 큰일 날 일이다. 고향의 말은 어머니 탯속에서부터 배운 말이다. 그 말은 우리가 죽어 저 세상에 가서 말을 한다면 거기서도 쓰는 말이 틀림없이 고향 말일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근본’을 중시했다. 만일 누가 행동을 이랬다 저랬다 하면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요새는 그런 말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뿌리가 없는 사람, 정체성이 없는 사람, 됨됨이가 헝클어진 사람을 일컬었다.

고향말은 어머니의 탯속에 있을 때부터 배운 그 사람의 근본을 형성한 말이므로 누구도 시비를 걸거나 폄하하거나 내칠 수가 없는 말이다. 고향말은 어머니와 고향이 가르쳐 준 영혼의 말이다. 여기다 대고 표준말이니 사투리니 하는 것은 한참 어리석다.

아파서 누워 있거나, 쓸쓸하고 외로울 때나, 사는 것이 고달플 때 고향말로 누가 위로해 주면 금방 생기가 돈다. 한마디 고향말은 열 가지 슬픔을 달래준다. “이것 먹고 언능 기운 차리랑께.” “요새 다들 심들게 살어.” 고향말은 위로의 말이요, 힐링의 말이다.

그러므로 고향말을 잊어버리면 영혼이 아프기 시작한다. 나는 거친 세월이 씻어가 이제는 잘 생각나지 않는 고향말들을 애써 찾아볼 때가 있다. “워매, 너 왔냐?” 내가 어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하시던 말. 그러고는 나는 남도 출신인 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남도에 태어나고 싶다. 무엇보다 남도의 말이 한정없이 좋아서다. 보석과도 같은 남도의 말 속에는 학다리 들판, 월출산 봉우리, 영산강 물줄기를 터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인정과 기쁨과 슬픔이 마디마디 새겨져 있다. 그 말속에 사람살이의 이야기가 스며있다.

어머니의 탯속에서부터 배운 탯말, 나를 키워 준 전라도말에게 영원한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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