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정상이 목재다리를 걸어가 다리 끝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대담을 하기 시작한다. 둘 사이에는 탁자가 있고 탁자 위에는 각 정상 앞으로 물잔과 찻잔이 1개씩 놓여 있다. 대담은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북측 정상 김정은은 진지한 표정으로 혹은 긴장된 표정으로 남측 정상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경청한다. 두 정상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성영화를 보는 듯하다. 남측 정상의 표정은 카메라의 위치 때문에 등쪽만 보이고 두 번인가 찻잔을 들어 마시고, 손짓하는 제스츄어가 보인다. 김정은은 물잔, 찻잔을 한 번도 손을 대지 않는다. 너무 진지하거나 긴장한 탓일까.
김정은은 한두 번 뿔테안경을 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는데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미묘한 미소다. 이따금 무어라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한다. 하지만 김정은은 주로 듣는 편이다. 김정은의 뒤쪽으로는 수십 년 녹슨 분계선 표지판이 가리켜주는 지뢰밭 숲이 있다.
30분이 넘도록 두 정상의 대담은 계속된다. 이 감격적인 장면을 영상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꿈인가, 생시인가. 어떤 사람은 영상을 보고 눈물을 훔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영상이 북측에는 바로 생중계되지 않는다. 어쨌든 보도다리에서의 대담 장면은 거실 벽에 걸어두고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겨놓고 싶다.
여기까지는 내가 감성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본 정상회담 장면들이다. 그날 이후 신문에는 동해선, 경의선 철도와 도로 연결 등 미구에 북한에 관광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북한 지원 방침 기사가 뜨고, 사람들은 이에 들떠 ‘평양냉면 옥류관 전국 체인, 대동강 캔맥주 편의점 판매, 개마고원 락 페스티발 개최’ 같은 말들을 꺼내며 흥분이 고조된 상태다.
70년 얼어붙어 있던 동토가 그렇게 한 순간에 녹는다면 얼마나 좋으랴. 휴전선 최북단의 버려진 땅값이 폭등하고, 김정은이 평양서 가져와 오찬에 내놓았다는 평양냉면 소식에 서울의 냉면집이 손님들로 북적였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냉정을 회복하려 애쓴다.
평소 북한 관련 책들을 찾아 읽고, 탈북자들의 북한생활에 대한 증언을 많이 접해온 나로서는 북한의 1인 수령 지배체제가 얼마나 공고한지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기에 사람들의 흥분을 이해는 하면서도 너무 나가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남북정상 회담의 주제는 북한의 ‘핵 폐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합의서의 마지막에 나온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했다’는 한 문장을 얻기 위한 회담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머지 합의는 남북관계의 긴장완화, 평화정착 등에 관한 합의들로서 시간이 걸리는 부차적인 것들이다. 주로 남측이 북측을 도와주겠다는 내용들이다. 이런 장밋빛 합의들은 핵폐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꼴이 될 것이다.
하룻밤 자고 나니 사람들은 갑자기 넋이 나간 모습으로 두 정상을 엄지척하는 표정들이다. 지난 수십 년간에 걸쳐 못 먹고 못 입고 수백 만이 굻어죽어 나가면서까지 핵개발에 올인하여 마침내 원자탄, 수소탄 개발, ICBM, SLBM 같은 강대국이나 가진 무기체계를 완성한 북한이 하루 회담으로 그냥 포기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성급하다.
사실 북한은 그동안 두 차례의 남북정상 회담을 통해서 이미 비핵화를 합의한 바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6.15선언을 하고 돌아와 ‘북한은 핵개발을 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말했다. 이번 4.27남북회담 공동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했다. 이번 3차 남북정상 회담은 6.15선언, 10.4선언에 나온 합의를 집대성한 인상이다.
그리고 거기서 구체적으로 몇 발짝 더 나간 것으로 보인다. 올해 안에 종전선언, 평화협정 전환을 한다는 것이 그렇다. 가슴이 쿵쾅거릴 정도로 놀랍고 벅찬 합의다. 그러나 종잇장에 쓰여진 아름다운 문구도 구겨버리면 그만이다. 히틀러와 체임벌린 간의 합의문서, 키신저와 레둑토의 파리평화협정이 대표적인 사례다. 문제는 합의의 실행여부다. 핵폐기 문제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회담으로 넘긴 상황인데 어떻게 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물론 국제적인 이슈인 북한의 핵폐기 문제가 미북회담에서 타결되지 않을 경우 헝클어질 수도 있는 남북, 북미, 한미 관계다. 한미동맹에는 영향이 없을까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중대한 모멘텀에 있다. 자칫 꿩도 잃고 매도 잃는 입장이 되지 않을까하는 염려도 없지 않다.
서울 불바다 운운하던 사람들이 왜 마음을 바꿔 판문점의 분계선을 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북한의 핵개발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압력에 견디다 못해 손들고 나온 것이다. 우선 살고 봐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 놓인 북한이 남북회담의 성과를 들고 가서 트럼프를 만나 담판을 지어보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도보다리 벤치에서 30분이 넘도록 왜 김정은은 물도 차도 마시지 않았을까. 북한의 속셈을 알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담대한 걸음이 계속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