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 짓고 사는 게 제일 자신 있습니다
농사 짓고 사는 게 제일 자신 있습니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4.12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농민운동가 유시훈 씨 가족 이야기

아직 초등학교 입학도 하지 않은 일곱 살박이. 날마다 엄마와 함께 동화책 읽기 연습에 한창인 창현이에게 미국이 어떤 나라냐고 물었다. "나쁜 나라요. 우리 것 다 뺏어가잖아요"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한다.
초등학생인 설지는 '911 테러'가 일어난 뒤 학교에서 교사 얼굴을 붉히게 만든 장본인이다. '죄없이 테러로 죽은 사람들을 기리자'는 교사의 말에 설지가 '미국은 깡패 나라니까 당연한 거예요'라고 반박한 것. 그 뒤 교사는 미국에 대해 더 이상 아무말도 언급하지 않았단다.

그런가하면 맏이 경현이를 비롯한 세 아이는 광주 시내 나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애들이 시내만 나가면 머리가 아프고 숨이 막힌다고 빨리 집에 가자고 해요" 이들의 엄마인 박미옥씨(37)의 이야기다. 그만큼 아이들이 깨끗하고 조용한 농촌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TV도 보지 않는다. 오히려 들이나 산을 찾아 다니며 자연 느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아이들은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유시훈씨(39) 가족을 보고 하는 말이 아닐까.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행정상 광역시에 속하지만 이 마을은 농촌이나 다름없다. 이곳에 유씨가 둥지를 튼 지 벌써 16년째. 유씨 부부는 둘 다 7남매 중 막내라는 점부터 '인연'으로 통한다. 게다가 둘 다 젊은 시절 화려한 도시생활을 마다하고 농촌에 들어왔으니 이런 사람들을 보고 바로 '천생연분'이라 하나보다.

농민운동이라 하면 거창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씨 가족을 보면 다른 집과 다를 게 하나 없다. 남들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똑같이 느끼고 생활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해가 뜨면 들에 나가고 저녁이면 농기계 손질하는 평범한 농민들이다. 그리고 똑같이 농민들이 외면당하는 현실에 분노할 줄 아는 '살아있는' 사람들이다.
"광주 시 행정에는 농민이 없어요. 광주 땅 중에서 농업 면적이 가장 많은데도 농업 행정을 보면 '국'도 아니고 '과'에서 불과 몇 명이 광주 농업을 책임지고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대학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흙냄새 사랑하며 사는 부부
아이들도 "시내 나가면 숨이 막혀요"


한 번은 다음과 같은 일도 있었다. 정부에서 60%의 지원금을, 나머지는 해당 시와 구에서 절반씩 책임을 져 농기계 보관창고를 만들기로 했으나 광산구는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정부와 시에서 지원된 예산을 다시 올려보낸 것.

그러나 언론이 이같은 행정을 고발하자 한달도 채 되지 않아 광산구는 예산을 마련해 농기계 보관창고를 만들기 시작했다. "농민들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소리쳐도 안되더니 공무원들 언론 앞에선 꼼짝 못하더군요" 그래서 광주시 행정만 생각하면 속이 탈 수 밖에 없다. 관계자들에게 항의라도 하는 날엔 오히려 '다 해주는데 뭐가 불만이냐'는 반문을 받아야 한다고.

때문에 농민들은 끊임없이 정부를 향해 소리치고 있다. "최소한 농민 취급은 해줘야 살 맛이 날 것 아닙니까" 그 목소리에 힘을 싣는 것이 바로 젊은 유씨 부부의 역할이다. 그 목소리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화를 향한 저항의 소리로 퍼지길 이들 부부는 바라고 있다.

20여년 세월을 유씨와 함께 알고 지낸다는 조계인씨는 이들의 장점은 '변하지 않는 우직함'이라고 자랑한다. 유씨는 "여기 안 살면 어떻게 살아갈지 답이 안 나오기 때문에 머물 수 없다"고 표현하지만 조씨는 "갈 데가 있는 사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며 유씨의 그런 대답이 오히려 고마워진단다.

그런 점 때문인지 유씨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다. 집 근처에 있는 황룡강에 낚시하러 온 사람부터 함께 농사 짓고 있는 사람, 심지어 농촌의 분위기를 취재하러 들린 기자들까지 이 집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 거린다. 유씨 가족에게서 누구나 오랜 벗처럼 맞이해 따뜻한 식사 한끼 대접하는 '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