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게 욕심인가요
사람처럼 살고 싶다는 게 욕심인가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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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영화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은 추억과 낭만을 한꺼번에 안겨다 주곤 했다.
1950년대말 만들어진 이탈리아 영화 '철도원'과 1999년 상영되었던 일본 영화 '철도원' 모두 그랬다.

이탈리아 영화에선 50세된 늙은 기관사 아버지를 영웅으로 알고 있는 소년 산도르는 길고 긴 대열의 열차를 끌고 가는 힘찬 기관차를 모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라는 사실에 커다란 보람과 긍지를 느낀다. 일본 영화에서도 주인공은 기껏 한 량 짤리 낡은 기관차의 발착을 유도하면서도 신호 복창을 거르지 않는 원칙주의자로 그려진다.

98년 철도원 제복을 입기 시작한 이성계씨(33)는 이 두 영화에서 무엇을 느낄까. 칙칙폭폭 소리만으로도 정겹게 느껴지는 장면들. 강을 따라 산허리를 뚫고 혹은 들판을 가로질러 끝없이 이어지며 아스라이 사라져 가는 철길 속에서 그는 철도원의 이면의 생활을 생생히 들려준다.

영화 같은 낭만, 그러나 현실은...
정부 외면 속에 개선되지 않는 환경


"철도원은 정상적인 사람 생활을 못하는 직업이예요" 철도원은 보통 직장인들이 말하는 주말 개념의 휴일이 없다. 하루 온종일 쉬고 다음날 출근하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자연히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이 사라지고, 동창회 한번 제대로 못나가 직장 동료들 외에는 친구들도 없다. 집에 가면 쓰러져 자기 바쁘고 취미 생활, 문화 생활은 포기한지 오래다.

대신 이것들과 맞바꾼 게 있다면 위장병, 소음성 난청, 허리 디스크 병이다. 또, 철도에서 퇴직한 후 일반인들과 같은 생활 리듬을 찾지 못해 수명이 짧아진다는 흉흉한 설도 있단다.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런 노동 현장일 줄은 꿈에도 몰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이들의 환경 개선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이씨는 더욱 화가 난다. 50년대 영화속의 생활과 현재 철도원의 근무환경이 크게 다르지 않은 까닭도 여기 있다. 대책없이 95년부터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7천명의 인원을 감축한 탓에 이들의 일거리는 남은 사람의 몫이 됐다. 게다가 일반 공무원보다 주당 80시간 이상 근무를 함에도 월급은 15년차가 2백만원 정도 받는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이씨를 더욱 분통터지게 만드는 것은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하고 철도 울타리 속에 갇혀 묵묵히 일하는 힘없고 빽없는 철도원의 현실"이다.

'울타리'에 갇혀버린 그들
이젠 철도원들끼리라도 목소리 낼 터


결국 아무도 관심갖아 주지 않는 현실 속에서 철도원들이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얼마전 파업도 이런 고민의 연장선상이었다. 이씨를 포함한 철도원들은 "2001년, 철도현장에는 34개의 빈자리가 생겼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무리한 인원감축으로 한계량을 넘어선 노동에 시달리던 동료들이 하나 둘 쓰러져 회송역도 없이 떠나버렸다"며 "죽지 않고 일하는 희망의 일터"를 요구했다. 그렇게 외쳐서라도 정부와 철도청의 무관심을 깨뜨려 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파업 이후 현장엔 찬바람이 불고 있다고 이씨는 전한다. 구속 11명, 고소 고발자 58명, 직위 해제자 20여명 등 결국 정부와 언론은 이들을 '일탈 행위'로 치부해 버린 것. 철도원들의 목소리가 높을 수록 사회는 울타리의 벽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씨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한 때는 노동자라는 단어가 부끄러웠지만 이젠 아니다. "남들 앞에 떳떳이 제 목소리를 내며 사람답게, 주인답게 살고 싶다"고 한다. "다른 나라처럼 사람의 리듬을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는 노동 조건을 꼭 만들어내겠다"는 신념을 갖고.

한살이라도 어린 자신부터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이씨. 그는 기관사를 아버지로 둔 아이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게, 50년 전 영화처럼 자식에게 존경받는 철도원이 되겠다는 꿈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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