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끝에서 느끼는 사람 내음
붓 끝에서 느끼는 사람 내음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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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선 영화 개봉을 '간판 올린다'고 말한다. 끝내는 것은 간판 내리기다. 명장면과 스타로 치장한 간판은 영화의 얼굴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 간판은 영화라는 요리에 침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다.
60,70년대 사람들은 '어쩜 저렇게 똑같을 수 있을까'. 길가다 멈추고 일류 배우의 자태를 감상하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또, 잘 그린 그림 한 편은 영화의 흥행을 좌우하기도 했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박태규씨(37)가 평범한 전업작가 대신 '광주극장' 간판쟁이가 된 것도 "어떻게 저렇게 큰 그림을 잘 그릴까"라는 동경과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곳에선 학벌이 중요치 않았다. 박씨도 다른 이들처럼 붓통을 씻거나 간판을 내거는 막노동부터 밑그림 글씨 중간그림 최종그림의 도제식 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시너 냄가가 코를 찌르는 페인트를 물감 삼아 배우 눈동자가 세숫대야만큼 커지도록 사진을 몇천배 넓이로 확대하는 작업은 어떤 회화에서도 찾기 힘든 '걸리버' 스케일이다. 박씨는 바로 이 매력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이 작업을 멈출 수가 없단다.

특별한 장비 없이 원화에 가로세로 모눈을 그어 옮기는 수작업을 하며 한개 완성하는 데 꼬박 닷새 밤낮을 쏟는다. 최근 컴퓨터 출력장치로 인화한 초대형 사진들이 극장 간판 자리를 밀어내고 있지만 박씨는 사람의 숨결과 땀냄새가 묻어있는 '붓의 맛'을 고집한다.

그럼 화가로서의 박씨의 삶은?
처음엔 일 따로 작품활동 따로였다. 문턱 하나를 두고 그는 작업실을 달리 사용했지만 좀처럼 간판과 작품이 일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게 예술은 아니거든요" 같은 전업작가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작품들을 보면서 그는 가볍고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자신의 생각들을 간판그림화 시키는 것이었다. 지난해 5월 기획 전시한 '5월 정신전-행방불명'에서 만난 그의 작품은 모두 영화간판이었다. 그는 앞으로도 "사람과 가깝게 갈 수 있는 내용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들을 만들고 싶다"고 전한다. 이는 점점 자취를 감추는 영화간판의 숨을 잇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인권의 문제만큼 자연도 소중히 지키고 싶다는 그는 이외에도 광주환경운동연합회, 환경을 생각하는 미술인모임, 물한방울 흙한줌 모임 등의 활동을 통해 그의 작품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 한 프로그램을 통해 만나는 어린이들에게 항상 그는 똑같은 주문을 한다. "그리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표현하고 싶은대로 표현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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