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부탁해 !
고양이를 부탁해 !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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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각 지자체는 한 특이한 공문을 접수했다. 환경부가 이른바 '들고양이 관리지침서'를 발송한 것이다. 이 지침서의 요지는 지자체별로 '들고양이 구제위원회'를 구성해 덫을 놓거나 총기를 사용해서라도 현재 생태계를 교란하는 주범으로 지목된 들고양이들에 대해 일대 소탕작전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들고양이들의 수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두어 해 전부터 유사한 사건이 이따금 뉴스가 되곤 했지만 특정한 지역들에 국한된 것이었지, 이번처럼 전국적 규모의 캠페인이 벌어진 것은 아니었다. 경기침체, 실업난, 남북협력교착사태 등,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도 풀기 어려운 난제들이 촘촘하게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앙 부처가 나서서 전국적으로 들고양이 퇴치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보면 들고양이로 인한 폐해가 심각한 정도인가 보다.

그렇게 이해하려고 하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석연치 않은 감정이 잡힌다. 역사상 한국사회에서 들고양이나 집고양이나 가릴 것 없이 고양이는 대체로 환영받지 못한 존재였음을 알고 있는 탓이리라. '고양이는 요물이라더라', 혹은 '고양이는 제 주인을 배신한다더라', 혹은 '고양이는 늘 해꼬지를 한다더라', 이런 말들이 대대로 대물림되면서 고양이는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기괴하고 낯설은 문화적 타자(他者)로 각인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이번의 들고양이 소탕작전에도 해묵은 고정관념이 알게 모르게 개입되지나 않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농경사회였던 한국에서 고양이는 쥐잡이로 한 몫을 해왔다. 그런 만큼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을 법한데도, 어찌된 일인지 한국의 문화관습 속에서 고양이는 오로지 불신의 대상으로 재현될 뿐이다. 집안의 또 다른 방범 파수꾼이었던 개와는 사정이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어린 시절 농촌에서 자랐던 사람이라면 고양이에 대해 좋지 않은 일들을 한 두 가지 기억하고 있을 터이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 곡물의 손실을 막아주긴 하지만, 이따금 부뚜막 위의 생선이나 뒷마당에서 노는 병아리를 주인 몰래 슬쩍 삼키기도 한다. 그럴 경우 그 고양이가 그 이전에 쌓아온 모든 공은 단번에 무너지고 주인의 눈에는 단지 배은망덕한 도둑놈으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하지만 생선이나 병아리를 탐하는 것은 본래 육식동물인 고양이의 천성에 어긋나는 일이 아닐진대, 주인은 사전에 대비를 하지 않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으례껏 애꿎은 고양이만을 탓하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고양이는 집안에서 키우는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털이 보드랍고 체구가 작아 주인의 귀여움을 받게 된다.

주인의 애무에 가르랑 소리를 내며 화답하다가도 돌연 날카로운 발톱으로 주인의 손등에 생채기를 내어 사랑이 한 순간에 증오로 급변하는 일이 다반사다. 이 때에도 역시 주인은 고양이가 할퀴는 것이 주인의 행동을 모방하여 제 애정을 표현하기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자신의 몸에 생채기를 냈다는 사실에 고까워할 따름이다.

이런 미시적인 관찰방식을 이번 들고양이 소탕작전에도 적용해보자. 당국은 들고양이가 다람쥐 꿩 등 야생동물과 농작물을 헤쳐 골칫거리가 되었으며 특히 서울의 남산처럼 도심 야산에서는 천적이 없어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라고 한다. 여기서 정말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것이 고양이인지 다람쥐 꿩인지를 따져보자고 하진 않겠다.

그러나 '도심 야산의 생태계 파괴 운운' 하는 대목에 대해서는 유감천만임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무분별한 개발로 산을 마구 파헤치고 제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자동차를 남용하고 유독한 오염물질들을 만들어 환경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도시를 뒤덮은 콘크리트는 모든 생물에 필수적인 물의 저장을 가로막고 도시에서 배출되는 소음과 공해는 나무는 커녕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한다.

오늘 우리가 경악할 일은 들고양이에게 천적이 없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쩌다 먹이사슬이 들고양이에서 멈추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적자생존을 주장하는 다윈의 이론은 또 한편으로는 만물이 공생하는 자연의 신비를 논한다. 자운영풀은 인간에게 양모를 공급해주는 양들의 먹이가 되는데, 꽃의 특수한 형태로 인해 오로지 땅벌에 의해 수분받이가 된다.

그런데 땅 위에 집을 짓는 땅벌의 천적은 들쥐이고 들쥐의 천적은 고양이이다. 자운영꽃이 만발한 풍경에는 들고양이들의 공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은 남산의 정상까지 자동차를 몰고 가서 거기서 다시 하늘 높이 솟은 타워의 꼭대기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서 까마득한 아래를 굽어보는 데에서 오만한 쾌감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인간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다윈의 '화묘도'를 되살려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야만스런 '인종 청소'를 방불케 하는 무조건적인 들고양이 소탕작전을 펼 것이 아니라 불안하게 쓰레기통을 뒤적이며 뒷골목에 숨어살거나 산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는 버림받은 고양이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를 마련해주는 관대함이 결국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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