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하지 않는 폭력들
반성하지 않는 폭력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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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유일한 강자로 승승장구하던 미국이 자국내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비행기테러를 당하고 잠시나마 전세계의 '동정'을 받는 비참함을 겪는 처지가 되었다. 이 '불우한' 나라의 대통령이 피력하는 의견은 연일 세계의 톱뉴스가 되고 사람들이 경청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 시민들은 그들이 미국에 대해 가졌던 '동정'이 얼마나 감상적이었던가를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뉴스에 보도되는 부시의 언사는 사람들이 피해자에 대해 인도적 차원에서 가질 법한 그 어떤 정서도 물리치는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사건 직후 부시는 테러 주체들을 '악'의 세력으로 규정했으며 마치 서부극 혹은 갱스터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Wanted: Dead or Alive"(죽이거나 생포하거나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명수배)라는 표현을 써가며 범인 체포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고 '무한정의'라는 코드명 아래 보복공격의 작전을 소개했다. 그러다가 이슬람 세력의 개입설이 제기되자 이번에는 자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자유진영의 역사적인 '성전'(영어로 Crusade)이라고 공언했다.

부시가 말한 '크루세이드'는 이슬람 과격파의 '지하드'(아랍어로 '성전'을 뜻함)에 대응한 것이겠지만 역사적으로는 서구 기독교국가들이 이슬람권에 대해 벌였던 중세의 십자군원정을 일컫는 단어이기도 하다. 실제로 일부 이슬람국가들은 부시의 '성전' 운운에 유감을 표명하고 해명하도록 요구까지 했다. 이쯤되면 세간에 유행하는 이른바 '문명간의 충돌'이라는 섬뜩한 가상 시나리오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련의 표현들을 보면서 우리는 부시와 그가 적으로 규정한 이슬람 과격파들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언뜻 헤아리기 어렵다. 더욱이 그 엄청난 사건이 절대로 현명하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아 암울한 생각만 든다.

요며칠 국내 정가에서는 지난달 28일 국군의 날 기념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한 연설을 놓고 공방전이 오가고 있다. 야당에서는 김대통령이 6.25전쟁을 우리 역사상 세 번째 통일시도였다고 규정했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의 사상과 역사인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난하고, 청와대측에서는 야당이 연설내용을 거두절미해 왜곡하려든다고 반박한다. 이같은 공방은 국내 정가의 익숙한 풍경이므로 구태여 고민할 거리가 되지 않지만 더불어 또다른 왜곡시비를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그동안 반민주적인 언론권력의 표상으로 지탄을 받아왔던 조선일보가 며칠 전에는 "윤전기에 타격 가하는 깡패 방식 언론운동 필요"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달은 기사(9월 26일자)로 모 시민단체가 주관한 행사와 일부 발표자의 발언을 왜곡 보도한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미국 대통령의 테러사건관련 언사와 국내에서 전개된 일련의 왜곡시비들을 나란히 거론한 데에는 처음부터 어떤 속깊은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양자 사이에 잠재한 어떤 논리적 상관성을 밝히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최근에 마음을 산란하게 만드는 사건들이어서 거기서부터 얘기를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글을 쓴 '의도'가 잡히는 것 같다.

인용한 부시의 언사들에서 보듯이 미국은 테러에 대해 보복계획을 짜기에만 급급할 뿐, 왜 미국이 테러의 표적이 되는 지를 반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6.25전쟁은 공산정권에 의한 남침이라는 공식 이외에 어떤 역사기술도 소위 '사상'의 의심을 받는다. 하지만 통일은 성스런 민족적 사명이라고 외치기보다는 정작 통일에 필요한 실천적 논의와 모색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통일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왜 분단이 초래되었으며 반세기가 넘게 분단상황을 고착시킨 것이 무엇인가를 짚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조선일보는 자사를 비판하는 것에 발끈하여 보복적인 방어자세를 취하기 전에 왜 안티조선운동이 확산되는지를 반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언론권력'이든 '초강국'이든 혹은 어떤 정치적 세력이든, 진정한 의미에서의 '힘'있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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