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란교수의 이 시대의 지식인을 읽고..
김정란교수의 이 시대의 지식인을 읽고..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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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가
- 김정란 교수의 글을 읽고

"악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은 그 악과 맞서 싸우는 것이다. 악이 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수록 그는 점점더 자유를 잃어간다. 그리고 결국 그 악이 만든 철창안에 갇혀 악이주는 밥을 먹고, 악이주는 이불을 덮고 악이주는 시간표대로 자신의 생을 살아가야한다." - 필자


   
"어지러운 사회 안에서 지식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위치를 가장 위험하고 가파른, 누리는 것 없이 의무만을 짊어져야 하는, 존재를 옹색한 벼랑 끝에 올려놓는 일이므로.."
이 시대의 지식인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김정란은 던진다.

"정보가 소수에게 독점되던 시대는 가고, 대중은 지식인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때로는 희화화되기도 한다. 이제 지식인은 겸손해야하며 과거의 누리던 대중의 존경과 경외심을 되찾으러 발버둥쳐 봤자 역사를 되돌리려는 우스꽝스러운 짓에 불과하다."
김정란교수는 변화한 시대적인 흐름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가치를 분별해 주고, 무질서한 대중의 견해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견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이 이 시대 지식인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새로 이사한 집에 모기가 너무 많아서 엊저녁에도 모기를 무려 15마리 이상 때려잡는 개가를 올리고 나자 몸이 무거워 지면서 담배 생각이 절실해 진다.
내가 맘놓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나만의 공간 베란다로 나가 쭈그리고 앉았다. 달빛은 완연히 '이제 가을이야, 넌 이 가을을 아주 많이 느껴도 충분해 한번 느껴봐! 하듯이 맑고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집 앞 언덕 배기에 죽 늘어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들은 이러한 가을빛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에 자유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자유라는 말은 지난 10여 년간 내가 늘 머리 속에 담고 사는 내 삶의 화두였다. 자유! 그 말이 떠오르고 나서 죽 내 생각을 이어가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어떤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건 어떤 것을 완전히 파악해 냈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것의 반대 편에 서는 일이다. 그것 안에 갇혀 있는 이상 어느 누구든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것이 주는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것으로부터 좀더 많은 자유를 향유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격렬하게 그것에 대항해야 한다. 어떤 것을 자신의 내부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점점 자신이 그 어떤 으로부터 자유스러웠던 폭이 점차 줄어든다.』

내 삶을 가장 힘겹게 해 왔던 고민은 바로 얼마만큼 자유스러워질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김정란 교수는 이시대 우리사회의 지식인을 건지는 것 없이 자기 희생만을 요구받는 아주 고통스러운 존재, 혹은 위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이 정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어느 시대 건 지식인은 항상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고 사회적 흐름의 지렛대 역할을 해 왔었기 때문이다.

지식인의 말이나 행동이 사회적인 함의를 담고 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그것은 사회적임과 동시에 개인의 자아(욕구)를 실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김정란 교수가 이 시대 이사회의 지식인론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다분히 지식인이라는 한 개인의 실존적 혹은 정서적인 고민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지식인은 이미 어떠한 행동을 하던 그 속에 사회적인 의미와 역할 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정란 교수의 견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력의 발전이 따르는 상부구조의 변화를 지식인인 한 개인이 받아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차원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김정란 교수가 빠진 딜레마는 여기에 있다.(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고민일 뿐이다. 왜냐하면 어떤 한 지식인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말든 사회는 이미 그렇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의 대중적 공유에서 오는 지식인만의 전유물 상실, 물적 생산성의 어마어마한 증가와 그것의 대중적 공유에서 오는 기존 권위들에 대한 도전과 그것의 희화화(이것은 마치 원시공동체의 부족장의 권위가 밀려드는 물질문명에 의해 땅에 떨어지고 우스꽝스럽게 변해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들이 지식인들을 위기로 몰아넣고 있고 여기에서 힘겨워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녀는 이 대목에서 지식인들이 겸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제아무리 생산력이 발전하고 그것이 사람들의 의식을 높은 수준으로 이끌어도 그것들은 중구난방이고 방향을 잃은 풍랑속의 배와 같기 때문에 아직도 지식인들은 그 배의 키를 쥐고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방향을 잡아주는 것은 지식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해석할 뿐이다. 해석은 파편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이미 대중의 머리 속에서 행동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녀가 빠진 함정이 있다. (내가 왜 자꾸 함정이라는 표현을 하느냐 하면 역사적 흐름에 자꾸 몇몇 의식적인 요소를 도입해 본질을 흐리게 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이 고민의 해결점을 찾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지식인들은 자신의 실존적인 고민을 전 사회적인 고민인 냥 확대해서는 안된다. 김정란 교수가 말했듯이 이미 사회는 일부지식인들이 짜증을 내고 히스테리컬하게 반응해도 전혀 미동도 없이 흘러가는 영원히 변치 않는 도도한 자연이다.

지식인 개인의 고민은 지식인 개인의 고민으로 끝나야 한다. 그래야 거기에서 그 지식인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나온다. 기득권과 권위가 상실된다고 보편의 성안으로 퇴각한다든가, 찢어진 아우라의 베일을 움켜쥐고 이미 사라진 역사의 저편으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이런 것들은 그야말로 진보의 대열에서 낙오하는 흔하디 흔한 패배자들의 무리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다만 여전히 유효한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억압하는 그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자유스러울 수 있는 것은 끊임없이 그 반대편에서 그들에 대항해서 싸우는 것이다. 거기에 권위가 있고 사회적인 존경이 있고 지식인 고유의 기득권이 있다.

/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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