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문제의 핵심은 '자기 성찰'
친일문제의 핵심은 '자기 성찰'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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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철
우리에게 친일은 무엇인가

   
▲ 독립군들이 나라를 찾겠다며 피흘리던 그날, 조선일보는 일본천황부부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한다는 기사로 1년을 장식했다. 그리고 지금와서 "그때는 모두 그랬다"라고 말한다
"함부로 친일파라 비난하지 마라. 범위가 모호하면 그때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범위와 정도를 정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합의가 없다."

이것은 대작가 이문열의 말이다. 그뿐이 아니다. 연세대 유석춘 교수도 "그 때는 모두 그랬다"고 말했다. 이회창 총재 부친이 친일 시비에 휘말리자 한나라당은 DJ가 목포상업학교 시절 일본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을 내돌렸다. 맞불 놓기 식으로 너도 결국 그렇고 그런 친일파아니냐는 식이다. 이는 결국 전국민의 친일파로 만듦으로서 논점을 흐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고등학교, 대학시절 지독한 교련 교육을 받았고, 유신시대에 육군병장으로 군복무를 마친 필자는 졸지에 군부독재의 일원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작가 이문열이 말한 것처럼 친일파의 범위가 모호하기 때문에, 혹은 유석춘이 말한 대로 그 때는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누구나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반세기가 훨씬 지금까지 괜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일까.

냉철하게 생각해 보면 이들의 말이 전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친일문제는 도덕적 원죄로 통한다. 한국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친일파'는 다른 어떠한 형벌보다도 치명적인 낙인이 된다. 가령 누군가 자기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친일 시비에 휘말리게 되면 그것은 자신은 물론 가문에 치명적인 타격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은 모두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필사적인 방어자세를 취한다. 가장 좋은 예는 일제 때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였던 하판락의 경우이다(한겨레21 2001년08월14일 제372호).


"그때 태어난 죄로..."
"그때는 모두 그랬다..."
수구세력 강변으로 '친일' 정의 한계 모호

그러나
5월 광주에 있지 않았더라도
5.18에 대한 몫이 있는 것처럼
일제시대 태어나지 않았지만
'내몫'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것은 그러한 도덕적 원죄 의식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친일파의 득세과정이다. 한국사회에서는 흔한 말로 독립운동한 사람은 3대가 망했고 친일파는 3대가 흥했던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친일파가 극우반동으로, 애국자로 돌변했던데 반해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6.25전쟁 때 '부역' 혐의로 총살당하고, 독재 정권하에서는 고문당하고 감옥가기 일쑤였던 현실과 친일문제가 담고 있는 도덕적 원죄의식 사이에 놓여있는 간극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괴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전쟁과 분단, 독재정권의 탄압이 도덕적인 원죄 의식을 압도하면 할수록 우리가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은 더욱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친일문제에 대한 도덕적 시각은 일제 때 '부역'한 사람은 득세하여 권력의 중심에 서고 독립운동 한 사람은 거꾸로 6.25전쟁 때 '부역자'로 몰려 총살당한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쓰라린 역사적 현실 속에서 더욱 경직되어 갔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현실의 괴리를 참아내고 방어하기 위해 대중들이 가슴속에 지니고 있었던 최후의 보루였다. 생각해보라! '너 빨갱이지'하고 한번 찍히면 그의 운명이 끝나는 세상에서 그나마 선악을 제대로 판별할 수 있는 도덕적 기준은 친일 문제 밖에 없었다. 친일 문제는 반공이라는 야만적 논리가 횡행하던 시절 그나마 인간의 양심에 호소할 수 있는 마지막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색깔이 사상적 정치적 낙인이었다면 친일은 도덕적 멍에였다.

작가 이문열과 유석춘은 바로 이 틈새를 파고드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그들은 친일문제가 경직되어 있는 틈을 타 논점 일탈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친일문제가 경화될 수 밖에 없었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친일과 항일의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교묘히 끼어들기를 시도한 것이다. 친일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경직되어 왔다면 왜 그렇게 되었는가 진단해보고 대안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이거늘 그들은 그저 '다 그렇지 않느냐'식으로 일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모두 친일파로 만들어 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작가 이문열이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친일파의 범위가 모호한 것은 아니다. 이승만의 탄압으로 해체되어버리고 말았지만 이미 해방 직후 만들어진 반민특위는 친일 기준을 정해놓고 있다.

① 일본 정부와 통모하여 한일합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모한 자.
② 한국의 국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이를 모의한 자
③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④ 일본 국회의 의원이 된 자
⑤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한 자
⑥ 중추원 부의장과 고문 또는 참의가 된 자
⑦ 칙임관 이상의 관리가 된 자
⑧ 밀정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⑨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제기관의 중앙간부를 지낸 자
⑩ 군경으로 악질행위를 한 자
⑪ 국내에서 비행기 또는 탄약공장을 경영한 자
⑫ 관리들 중에서 적극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⑬ 일본국적의 취득을 위한 각 단체의 간부 중 악질 행위를 한 자
⑭ 종교·문화·사회·경제의 각 방면에 걸쳐 반민족 행위를 자행한 자
⑮ 반민 언론 또는 저술을 통해 일제에 협력한 자 및 특별히 개인적으로 일제에 협력한 자

필자는 이러한 구분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이는 너무도 구체이라고 할 정도로 상세하게 범위를 정해 놓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문열의 사고 수준에서만 보자면 범위가 모호하다느니 하는 말은 근거 없는 궤변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문열이 말하는 것처럼 합의가 없다고 한다면 이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는 왜 합의가 없는가 고민해 본적이 있을까. 언제 우리가 친일문제를 공론화 시켜 이성적인 대화를 할만한 공간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백범 김구선생 피격과 전쟁 이후 친일문제는 통일문제와 마찬가지로 늘 금기의 대상이지 않았던가. 그런 공간을 차단시켰던 자들이 바로 친일파들이었다면 작가 이문열은 그들에게 공론화의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친일문제에 대한 핵심적인 자료를 권력이 독정은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한 작가 이문열의 입장은 무엇일까.

다음은 '그때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시각이다. 이는 작가 이문열이나 유석춘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기도 하다. 이는 한마디로 존재론적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친일행위는 '그때 태어난 죄'일 뿐이다. 가령 어떤 청년이 신촌거리를 지나가다가 마침 시위 중이던 대학생들에 휩쓸려 '재수없게' 백골단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치자.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는 오로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이 유죄이다. 한마디로 현장에 잘못 끼어든 것이다. 그래서 그는 평생토록 '그 대학생 놈들 시위대에 잘못 끼어들었다가 몸만 조졌다.'는 사고를 버리지 못할 것이다. 독재정권 타도, 반미 투쟁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는 여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사안을 이렇게 몰고 가면 중요한 것은 현장검증만이 남는다. 즉, 용의자가 현장에서 범행을 했느냐 안했느냐, 어떤 경로를 통해서 범행이 이루어졌느냐를 확인하고 나면 그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처벌뿐이다.

작가 이문열과 유석춘은 친일문제를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때(현장) 잘못 끼어 든 친일파도 있을 터이니 옥석을 가려내기 위해 범위와 정도를 정하자는(현장 검증) 것이지만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 보인다. 그때는 다 그렇게 살았을 테니까... 이것은 두 사람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한 예로 인터넷 한겨레의 라이브폴이 2001년 8월 14일부터 8월 23일까지 네티즌들을 상대로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은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광복회가 만든 친일파명단을 검토한 뒤 국민에게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친일파 공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민족정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대답은 14082명(24%)인 반면에 '이미 지나간 일이니 덮어두자'는 의견이 44155명(75%)이었다. 이것은 질문 문안의 한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또다시 과거를 들춰내어 옥석을 가려내는 것 자체를 피곤해하는 듯하다.

그러나 친일문제의 핵심은 결코 '현장검증'을 통한 징벌이 아니다. 현장검증과 징벌은 친일문제 해결의 한 과정, 방법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다. 바로 그것에만 초점이 맞춰지니까 현장에 있었느냐 없느냐가 쟁점이나 되는 듯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객이 전도되면서 이문열과 유석춘 같은 사람들에게 논점일탈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한다면 이문열이 '...합의가 없다'고 한 것은 옳긴 옳은 말이다. 그가 말하는 합의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기보다는 물타기를 꾀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앞잡이와 애국자, 친일 관련자와 비관련자의 구분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명단'에서만 빠지면 그만이다. 그러면 친일문제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까. 친일에 대한 규정이 경직되다 보니 반대로 경계가 흐려져 버린다. 그리하여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 했던 할아버지, 면서기 지냈던 아버지, 구장(이장)을 맡아서 공출하러 다녔던 장인도 혹시 친일파 아닌가 자문하게 만든다. 도무지 헷갈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친일문제는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의 논법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친일파들의 노림수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친일문제의 핵심은 현장에 있었기 때문에 친일을 했고,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친일 면죄부를 받았다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의미 부여에 있다. 친일문제의 핵심은 결코 누구에게 돌을 던지자는 것이 아니다. 친일문제는 결코 하나의 사건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문맥 속에서 끊임없이 연결되고, 재해석되고, 의미망을 구성하게 된다. 친일문제는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우리 사회의 규범에 손짓을 한다. 너희들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고... 이건 아주 기본적인 역사 문법 아닐까. 친일문제가 현재진행형이지만 단지 어떤 특정한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도덕적 무기로 사용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정치적 생명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일제 때 어느 위치에 있었건, 창씨개명을 했건 안했건, 일제 강압이 강했든 약했든 친일문제는 그의 정치적 생명을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정치적 생명은 항일운동 했던 사람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적 생명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관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하는가가 그의 정치적 생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민족의 생명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민족을 파는 경우도 여기서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친일문제 해결은 바로 그러한 정치적 생명의 의의를 확인하고 복원하자는 것이다.

친일문제의 핵심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각각의 행위에 대한 자기성찰이다. 우리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이 창씨 개명을 했든, 면서기를 했든 정치적 생명을 복원하는 핵심은 자기성찰에 있는 것이다. 누구는 일제의 강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겠는가. 지금 '누가 더 잘했느냐' 재는 게 아니지 않는가. 이제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것인가, 전국민의 친일파라는 해괴한 논법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다.

그러한 정치적 생명의 복원은 민감한 문제인 만큼 매우 섬세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가령 말단 면서기가 펜대를 어떻게 놀리느냐에 따라 징용, 징병, 정신대에 끌려가고 안가고의 운명이 결정되었지만 그것은 작가의 펜과는 차원이 다르다. 춘원, 육당, 미당의 친일행위가 면서기의 그것과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개 헌병 보조원이라도 그 정치적 의의에 따라서 도지사의 경우와 다르게 판별 될 수도 있다. 그러한 정치적 의의를 제대로 판별하지 않은 결과, 김창룡은 해방 후 반공 권력의 바퀴를 돌리는 현장 감독으로, 미당은 TV에 나와 전두환 만세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임시정부 주변을 기웃거리던 사람들은 독립운동가로 대접을 받았고 만주 땅에서 얼어죽고, 굶어죽고, 총 맞아 죽은 사람들은 대접은 커녕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에 그만큼 정치적 생명에 대한 인식이 얇다는 증거이다.

많은 사람들이 2차대전 후 나친 부역자를 가혹하게 처벌했던 프랑스의 예를 든다. 친일파 문제가 워낙 권력에 의해 유린된 상황인지라 다른 예와의 대비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나. 프랑스의 예는 그야말로 철저한 서구 이성 방식대로 처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프랑스는 마치 칼로 자르듯이 정확하게 나누기를 좋아하는 이성중심주의라는 토대가 있었기 때문에 수만명의 나치 부역자를 사형시키거나 감옥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차원의 문제이긴 하지만 눈 하나 깜짝 안하고 6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실에서 처형하도록 과학기술, 시스템을 제공한 것도 바로 서구 이성이었다.

그렇다면 친일문제는 우리식대로 처리되어야 할 문제이다. 가령 프랑스는 남자건 여자건 부역자는 머리를 박박 깍은 후 거리로 내몰고 다녔다. 마치 청소를 하듯이 완전하게 소탕하고자 했던 것이다. 친일문제를 철저하게 해결해야 함은 공통적인 과제였지만 50여년 전 우리가 취해야 방식은 이와는 달랐으리라 본다. 징계와 관용의 한계를 정할 분별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비극은 그러한 분별을 갖추기도 전에 엄청난 물리적 폭압에 의해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는 것에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핏줄, 정서를 가졌던 북한은 해방 후 친일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를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북의 경우도 대단히 철저하게 일제 잔재를 청산했지만, 민족반역자로 직접 처형한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민족반역자로 처형된 사람은 거의 전부가 독립운동가를 체포, 고문, 학살한 고등계 형사들이나,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는 밀정질을 한 자들에 국한되었다. 우두머리급 친일파들이 대개 서울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북은 인적청산의 면에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상당히 관대한 정책을 실시했다. 일제의 강점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고, 조선인들이 마땅히 취업할 만한 곳이 없던 사정 아래서 일제 기관에 복무한 사람들을 다 가혹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또 만주의 산골에서 빨치산 생활을 한 사람들만으로는 새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일제 시기에 교육받은 사람들은 극소수를 제하고는 일제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 처지에서 이들을 모두 엄격하게 처벌하거나 새 나라 건설에서 배제한다면 공장 하나 제대로 돌릴 수 없었다. 그래서 이북의 지도부가 채택한 방식은 탄백(坦白)이었다. 탄백이란 일제 통치 아래서 자신의 과거와 자신이 범한 잘못을 솔직하게 당과 인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고 자신의 죄과를 감춘 것이 뒤에 드러날 경우에는 엄한 처벌을 받았지만, 솔직하게 고백한 경우는 독립운동가를 밀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용서를 받았다. 이렇게 탄백을 한 사람들은 당의 요직에 임명될 수는 없었지만, 정권기관과 기업소에는 등용되었다. 비록 나중에 해직시키기는 했지만, 초기 인민군의 건설과정에서는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군에 받아들이기도 했다. (한홍구 한겨레21 2001년 4월24일 제356호)

한편 이렇게 친일문제에 대해 도덕적 멍에만을 씌우려는 자세는 일종의 실용적 관점이 침투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한다. 다음은 조설일보 유근일 주간의 주장이다. 그의 논조는 말이 실용적인 관점이지 사실은 대중들의 생활 욕구를 자극해 대중들의 친일의식을 현혹시키고 있다. 좀 길지만 그의 글은 친일문제를 왜곡하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인용하겠다.

"진보적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논리상으로는 반드시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무엇이 더 우선해야 하는가?"의 양자택일 앞에서 8·15 해방공간에서는 그 둘 사이가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했고, 대한민국은 진보적 민족주의와 갈라선 자유민주 우선론자들이 주도해서 만든 결과가 되었다. 진보적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자유민주 우선론자들의 대한민국 건국은 친일파, 지주, 모리배를 안아들인 친미세력의 '반민족적' '반통일적' 배신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다가 53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그동안 그 숱한 결함과 어두운 사연들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제법 잘 나가는' 나라로 성공한 셈이 됐다. 그리고 비록 진보적 민족주의 취향에는 썩 맞아떨어지지 않았어도 그때 '대한민국을 세우기로 했던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 선택이었는지, 오늘의 시점에서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주의 과제도 '대한민국 53년'의 존재이유인 자유민주 우선론과 투철하게 맞아떨어지는 범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국민적 합의가 이룩됐다고 믿어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런데 요즘와서 보면 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마치 8·15 해방공간에서처럼 또다시 '반민족' '반통일' '친미 사대주의' '자주통일 반대하는 보수…' 운운하는 진보적 민족주의류의 격한 담론들이 도처에 메아리치고 있으니 말이다. 정말로 그렇다면 '대한민국 53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8·15 당시의 19∼20세기식 저항민족주의, 진보적 민족주의의 원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일까?

8·15 당시에는 모든 정황으로 봐서 많은 지식인들이 진보적 민족주의라고 하는 열정적 그림을 백지 위에 그리고 싶을 만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때 타올랐던 제3세계론마저 매듭이 끝난 오늘의 세계에서는 우리가 기존의 동맹관계를 떠나 그 어떤 형태든 탈서방적 저항민족주의 '통일'로 치닫는다 할 때 그것이 과연 우리 민족의 삶의 질 향상에 피가 되고 살이 될지는 극히 의심쩍다. 오늘의 민족주의는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면서 자유·민주·인권·환경·여권…으로 가는 지구촌 문명사회에서 우리의 이익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국제화된 민족전략'이라야 할 것이다.

하기야 강대국 패권주의와 불공정 게임을 견제한다는 필요성에서는 진보적 민족주의가 그 나름대로 소임을 지니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운동차원의 것이지 집권당이 앞장서서 가로맡고 나설 일은 결코 아니다. 우리의 경우 집권세력은 이런 흐름, 저런 흐름을 다 껴안고 조정할 생각을 해야지, 나라를 두 토막 내 그중 어느 한쪽만의 정권인 양, 특히 진보적 민족주의 한쪽만의 전위세력인 양, 당의 간판스타들까지 나서서 「반민족」이니 「반통일」이니 「친미」니 하며 외친다는 것은 국가경영자로서의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집권측은 그래서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남북을 진보적 민족주의로 묶기 위해서라면 남쪽의 반토막쯤은 「반민족」 「반통일」로 타도해버릴 수도 있다는 식의 「또하나의 분단」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다양성 속의 국민적 합의 노선으로 돌아서든지의 선택인 것이다.” - 조선2001.8.4 -

유주간의 글을 읽고 나면 조선일보가 어떻게 한국최고의 부수에 오르게 되었는지, 조선일보의 친일행위가 단지 일제 말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유주간의 글은 전쟁 후 피땀 흘려 일해 '이만큼' 살게 된 대중들의 정서에 철저하게 영합하면서 친일문제를 왜곡·은폐해 나간다. 유주간은 논설주간이 아니라 영업주간이라 해야 할 정도롤 대중들의 정서를 잘 읽는다. 김대중 주필은 더욱 탁월하지만 유주간의 글쓰기의 특징은 어떤 논리를 펴는데 있어서 철저하게 대중들의 생활 감각에 영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중들의 생활 정서를 방패로 삼고 있는 것이다. 말이 방패이지 그것은 역사를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글의 정치적 논리 수준은 중학생, 아니 시정잡배가 시장바닥에 앉아 막걸리 마시면서 얘기하는 수준이지만 그 노림수만은 매우 고단수이다. 이것이 조선일보가 판매부수를 올리는 비결이다.

그가 친일문제에 어떤 방패를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의 "그때 '대한민국을 세우기로 했던 것'이 그나마 얼마나 다행스러운 선택이었는지, 오늘의 시점에서 참으로 아슬아슬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통일이라고 하는 민족주의 과제도 '대한민국 53년'의 존재이유인 자유민주 우선론과 투철하게 맞아떨어지는 범위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국민적 합의가 이룩됐다고 믿어도 무방할 것 같았다."라는 말이 대중들에게 어떤 노림수를 지니고 있는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친일문제 해결, 좋아하네. 해방되고 나서 최소한의 행정경험 있는 사람들이 누가 있었어. 그나마 일제 시대 경찰, 군인, 군청서기, 은행원 했던 사람들이라도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망가진 나라를 이만큼 세워놓은 거야. 진보라고 입만 살아서 떠드는 너희들한테 나라를 맡겨놨으면 벌써 결단났을걸. 그래도 지금 이렇게 밥먹고 사는 게 다 너희들이 그토록 욕하는 보수 때문인 줄 알아. 우리는 그야말로 손인지 호미인지 모르고 일했어. 이제 와서 공도 모르고 허튼 수작 부리지마. 이제와서 친일 운운하면서 나라를 분열시키지 말라고. 어떻게 해서 세운 나라인데..."

적어도 기성세대라면 이 말에 정서적으로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조선일보가 탈세문제를 깔고 앉아서 '언론자유 수호투쟁'을 할 수 있는 배짱이 여기서 나온다. 이제 유주간의 선동으로 친일 규명은 졸지에 '반민족' '반통일' '친미 사대주의' 운운하면서 나라를 두 동강 내는 철없는 짓이 되고 만다. 친일문제 해결은 애써 쌓아온 생활 기반을 무너뜨리는 불안한 행동일까. 친일 규명은 과연 이렇게 분열적인 행동인가. 아! 우리는 아직도 친일파 등용이라는 고리채를 썼다가 대대로 엄청나게 비싼 이자를 물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현재도 비싼 이자를 물고 있는데 덮어둘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유주간은 그렇게 몰아가고 있다.

그러나 유주간의 이런 궤변은 두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째,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해방 후 이 나라를 세운 사람들이 친일파, 지주, 모리배들이었더라도(그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 자기의 말이 아닌 진보 쪽의 시각으로 돌리고 있다!) 53년이 지난 지금 '제법 잘 나가는' 나라가 다행스러운 선택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어서 잘 살면 되지 않느냐는 시각과 뭐가 다른가. 그의 자유주의적 시각의 내용이 이런 것인지 궁금하다.

둘째, 분열이라는 선동적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친일문제를 덮어두기식으로 합리화하려고 한다. 도대체 누가 편가르기를 하고 있단 말인가. 편가르기의 주범은 바로 '그들' 아니던가. 냉전시대에 낙인찍기를 전가의 보도처럼 잘 써먹던 그들이 사실 규명에 부닥치니까 편가르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유주간이 무슨 말을 하든 끝까지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다. 결국 친일문제의 해결은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로 귀결될 터이니까. 나는 '그 때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친일 '행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하더라도 내 몫은 분명 있을 듯하다.

오늘도 보잘 것 없는 네티즌인 나에게 이런 소리가 들려온다. "1980년 5월18일 네가 광주에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5.18은 너의 몫이다. 1950년 6월 25일 네가 '거기'에 없었더라도 피로 물든 살육전은 너의 몫이다. 살육자로서가 아니다. 왜 그렇게 총부리를 겨누었던가, 눈에 핏발을 세운 채 살아온 반세기를 성찰하는 것은 너의 몫이다. 그리고 너의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나비효과처럼 날아가 50년이 지난 다음에도 후대인들이 어떻게 평가할지 늘 유념하라. 네가 속한 관계 속에서의 정치적 생명은 항상 살아있을지니..."


* 남기는 글

지루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자는 언론개혁 논쟁에서 한나라당이 조중동 편들기 하는 것이 결코 남는 장사가 아님을 예상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조중동 싸움은 단지 언론 싸움이 아니라 수십년동안 우리 사회에 또아리를 틀어왔던 낡은 권력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싸움과정에서 친일문제는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한나라당은 언론개혁 싸움에 잘못 끼어 들면 개피 보기 딱 알맞다고 말이죠. 아니나 다를까, 한나라당은 친일 문제에 휘말리고 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어느 정도 가라앉는다 하더라도 대선에서 다시 고개를 들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제기하는 친일문제가 단지 각 정파간의 이해관계를 만족시켜주는 재료로 동원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친일문제는 단지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미래사회를 건설할 것인가, 우리의 미래사회는 어떤 규범을 가질 것인가, 또 우리의 사고의 지평은 어디까지인가를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정당은 어차피 지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모든 자원을 동원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친일문제를 각 정파만에 맡길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보다 냉철한 시각을 가지고 다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네티즌들의 냉철한 자세와 열띤 토론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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