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농사꾼, 그 변치 않는 얼굴 운봉에 '그들'이 살고 있다
조선의 농사꾼, 그 변치 않는 얼굴 운봉에 '그들'이 살고 있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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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원 운봉의 돌장승>

여름도 그 끝자락을 보이는 계절, 조선의 농사꾼이 보고 싶어 동행을 구했다. 들판의 꽃과 익어가는 벼와 하늘을 나는 잠자리에 관심이 깊은 꼬마친구 둘, 그리고 그들의 부모와 함께 다섯이서 남원땅 운봉의 300살 먹은 농사꾼을 뵈러 간 것이다.

카메라도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돈도 권력도 없는 농투사니 조상들을 무슨 빽으로 만나겠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지 모르지만, 이 땅을 지켜온 그들은 길섶에 풍찬노숙하면서 말없이 돌장승으로 남아 있다.

서천 북천 유곡리일대 돌장승들
부자연스럽고 광대뼈 나온 얼굴
고된 농삿일 농부의 얼굴 닮아


그길은 남원에서 함양가는 24번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해발 470m의 여원치라는 고개를 오르면서 시작된다. 모든 오르막 다음에는 내리막이 있지만 여원치의 운봉에 닿는 순간 내리막은 없고 드넓은 뜨락과 저 멀리 지리산이 시야를 가리고 우뚝 서 있는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지리산 바람이 상쾌하게 이마에 닿을 때 장동 버스 정류장 표시를 보고 고남산 아래 있는 권포리를 향해 갔다. 한 마을에 장승 커플이 둘이나 있는 특이한 마을이다.

원래 마을 장승은 마을을 지키고 병마나 잡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동구밖에 세웠다는데 이 마을은 그런 돌장승이 두 쌍이나 서 있는 것이다.

북천마을의 수구를 지키는 동·서방축귀대장군의 모습으로 오른편이 남자로 동방축귀대장군이고 왼편이 여자로 서방축귀대장군이다.
그 모양새는 위엄과 권위의 상징과는 전혀 다른, 혹 길을 물으면 감자라도 먹고 쉬엄쉬엄 가라고 할 것 같은 자상함이 묻어있다.
다시 함양 가는 길을 타면 이번에는 운봉 시가지 왼편 강변으로 푸른 숲이 보이는 서천리가 나온다. 그 오래된 숲으로 가다보면 무시무시한 모습의 장승 한 쌍이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의 것은 방어대장군, 왼편의 것은 진서대장군의 이름표를 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두 장승과 당산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장승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면 그 부자연스러움에 웃음이 베어 나온다. 오른쪽의 것은 벙거지 모자를 하고 왼쪽의 것은 삐에로처럼 고깔 모자를 쓰고 있으며, 모두 퉁방울 눈을 가지고 광대뼈가 볼록 튀어나왔으며, 뻗어 나온 이빨은 날카롭게 보이지만 요모조모 뜯어보면 고된 농사를 통해 단련된 농부의 얼굴이 또 그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서천리에서 다시 길을 잡고 조금만 가면 반암으로 가는 10번 국도가 나온다. 그 길로 100여 미터만 들어가면 북천리인데 그곳에서 또 한 쌍의 장승을 만난다. 이번에도 이들의 얼굴이 낯이 익은 모습이다. 오른편의 여자 장승은 귀가 축 늘어진 운주사의 미륵불을 닮았고, 왼편의 남자장승은 거미인간인 스파이더맨의 얼굴을 닮은 그런 모습이다.

다시 길을 잡아 함양쪽으로 가다 보면 동면의 유곡리 가는 길이 나오고 그곳 마을에서 또 두기의 장승을 만날 수 있고, 아영면의 의지리에도 두 기의 장승이 더 있다.

뜰이 넓었던 운봉 고을사람들은 장승을 통해 마을의 환난을 예방하고, 그들의 공통된 염원과 풍년을 빌었다고 전한다.
덕택에 전국 대부분의 장승이 사라지고 없음에도 이곳은 돌장승들이 독특한 모양으로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것이다.
지조보다는 실리에 눈먼 시대가 구역질이 난다면 그곳 운봉에서 그들과 얘기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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