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육질' 지식인이 좋다
나는 '근육질' 지식인이 좋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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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형배 참여자치21 운영위원장
- 김성재·임동욱 교수의 논쟁을 보며 -

Ⅰ.

김성재 교수의 표현대로 글쓰는 행위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요 몇 년 동안 감히 그런 '자유'를 엄두 내지 못했다. 10년여 해오던 신문기자 일을 그만 뒀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 일이라는 것이 하면 할수록 내게는 어렵고 두려운 부담으로 작용하였던 부끄러운 기억 때문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시각을 비판하는 글쓰기는 여전히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교수와 임동욱 교수의 최근 '논쟁'을 보면서 전선의 정립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자의적 명분으로 의견의 일단을 피력하는 용기를 낸다.

두 교수의 논쟁이 '언론개혁'과 '시민운동'을 키워드로 설정하고 있다면 나는 어쨌든 이들 행위의 주체로 언급되고 있는 언론노조나 시민단체의 일원이었고, 나름대로는 언론개혁과 시민운동의 올바른 성장을 열렬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분을 포함하여 이런 영역에서 앞서 개척하고 투쟁하는 분들을 뒤따르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 시민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 여기고 있다. 할 수만 있다면 논쟁의 초점이 되고 있는 영역의 활동가들을 옹호하겠다는 각오 또한 없지 않다.

내가 시민사회의 일원으로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듯이, 지금부터 잠시 글쓰기의 자유를 누려보려는 나는 '실천하지 않는 지식인은 죽은 지식인'이라고 비판하는 임교수의 주장을 지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때문에 '지식의 본질이 두뇌를 쓰는 데 있지 근육을 쓰는 데 있지 않다'는 김교수의 규정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다.

설령 지식의 속성에 그런 경향성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의 실천에서 두뇌활동은 일정 부분 '근육의 작동'으로 뒷받침되고 구체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두뇌와 근육의 단선적 구별짓기는 자칫 진정성의 의미를 거세해버릴 위험마저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이른바 '필드'를 갖지 못한 지식인, 아카데미즘의 울타리에만 무기력하게 갇혀 있는 지식인을 나는 함부로 염오(厭惡)하는 편이다. 나의 몇 분 선생님들이나 젊은 시인 김선우를 인용하자면 "'사상'을 '살' 때에만 사상은 사상이 된다"고 배운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김교수가 임교수의 논지 가운데 하나를 '피곤한 육신에서 나온 죽은 지식인론'으로 받아들여 이해의 폭을 스스로 좁히려 하는 것에 대해 나는 감히 자기 모순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두 분 모두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두뇌 작용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근육 작동을 부추겨왔고, 그런 실천적 행위 집단에 가담해 온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설령 형식과 방법의 차이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가담행위는 자체로서 유의미하다고 여긴다. 결국 '죽은 지식인론'은 김교수와 임교수 논쟁에서 곁가지에 불과하거나, 우선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남겨놔야 할 것 같다. 논란의 초점은 언론개혁과 시민단체의 역할에 맞춰져 있다.

Ⅱ.

임교수의 문제의식은 왜 언론개혁운동에 나서는 시민단체를 다른 지배집단과 같은 열의 '기생(寄生)자'로 규정하고 줄 세우느냐는 항변(?)이다. 나는 임교수의 이 같은 문제의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편에 선다. 김교수가 재반론을 통해 '글의 몇 구절을 문제삼아 글과 필자 전체를 판단하는 것 같다'고 변명하면서 한 발 물러서고 있지만, 시민단체를 '시민이 획득한 언론의 자유로부터 일방적인 이익을 챙기는 기생자(寄生者)'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김교수 글(의 전체 흐름 속)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김교수는 '야당과 보수적 지식인으로부터 '홍위병'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쓴 시민단체들'을 다섯 번째 기생자로 못박고 있다. 이들 시민단체의 중심에 민언련이나 언개련 같은 시민언론운동단체가 서 있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버스투어를 예로 들자면 '참여자치21'도 마찬가지이다.)

김교수의 글이 임교수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은 우선 '죽을 쑨 시민'과 '시민단체'를 별개로 설정하는 분리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비롯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언론개혁은 '기생자들의 몫이 아니라 시민의 몫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교수가 왜 시민단체를 기생자 집단으로 분류하고 있는지 납득하기 어렵다. 특히 재반론 글에서 '언론개혁의 주체에는 버스투어를 한 시민들도 주요한 멤버로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서도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정부논리에 대한 무비판적 수긍을 넘어 자기성찰과 독자적 활동전략 수립을 위한 제언'이라거나 '현 정권의 정치게임에 휘말릴 위험성'이라는 김교수의 담론이 내포하고 있는 함정에서 비롯된다. 김교수의 논리는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시민단체가 정부와 한편이라는, 적어도 동조하고 있다는 '비정합성(incoherence)의 오류'를 전제로 성립한다. 전제가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논증은 결과의 모순을 피할 길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김교수가 임교수의 지적처럼 시민단체를 '홍위병'으로 매도하는 논리와 같은 맥락에서 논지를 전개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같은 모순이 불가피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나는 김교수의 글에서 드러난 단선적인 역사인식 또는 현실인식의 안이함에서 찾는다. (비록 그것이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김교수의 "죽 쑤어 개 준다"는 이른바 '제3자 수혜론'은 아무래도 본질을 잘못 짚었다. 김교수는 우리현대사에서 5.18광주민중항쟁과 6.10항쟁을 '개 죽 쑤기'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전두환과 언론사들에게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헌납하기 위해 시민들이 죽을 쑨 적이 없다는 사실쯤은 상식에 속한다. 김교수도 헌납이 시민들의 의지였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죽을 쑤었으되 여전히 자신의 몫으로 취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죽을 쑤지 못했거나, 더 정확하게는 빼앗겼던 것이다. 왜?

김교수가 말하는 다섯 종류 기생자들 가운데 네 번째까지 기생자들(김교수의 분류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이 늘 '친구'였던 때문이다. 이 '친구'들은 굳건하게 연합전선을 형성해 강제력을 동원하고 현실을 왜곡하고 그에 기초해 지배권력을 유지해왔다. 상대적으로 시민사회는 충분한 조직역량을 갖추지 못했고(미조직화와 저성장), 지배집단의 분열 포섭책동에 자주 노출됐으며(개량화와 균열), 힘있게 저항하지 못한(투쟁역량의 미흡) 때문이다. 자기 몫을 찾으려는 '죽 쑤기'를 완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한 지배 블록의 가장 중요한 전투력, 즉 선전의 전위를 바로 '말의 권력'을 장악한 언론사들이 담당하고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그렇게 구축한 '마지막 성역'에 저항하는 오늘 시민단체의 언론개혁운동을 단호하게 '기생자'로 설정하는 김교수의 논리는 막무가내식 단순화라는 평가를 피할 길 없다.

현 단계 언론사 세무조사를 둘러싼 정부와 언론사간의 싸움질은 두 말할 필요 없이 지배블록 내 자기 분열의 한 양상이다. 시민들의 '죽 쑤기' 역량이 어느 정도 작용한 것이며, 시민사회의 처지에서 이 갈등은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 균열은 정부와 언론의 정상적인 관계가 설정될 때까지 계속될(그럴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지만) 필요가 있다.

국가와 시장(자본) 블록이 균열 조짐을 보이면 보일수록 시민사회의 선택 폭과 입지가 확대된다는 사실은 초보적인 상식이다. 따라서 죽을 쑤고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시민사회라면 이번 언론사주 구속 사건은 전술적 활용 대상이며, 전략적인 배척 요소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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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조·중·동을 일단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정부의 정략적 논리이기 때문에 시민단체가 이 논리에 거리를 두고 행위를 했으면 한다'는 김교수의 변명은 제한적인 설득력만을 갖는다. 때문에 이 같은 변명이 '국가권력의 언론장악 기도에 시민단체가 환호하고 있다'는 식의 지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며, 시민단체를 '홍위병의 누명을 뒤집어 쓴 기생자'로 규정하도록 용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실천과 대안을 담보로 하지 않는 지식인의 충고나 제언은 김교수가 다른 글에서 지적한 대로 '세 치 혀로 세상을 농락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언론개혁운동에 나선 시민단체에게 오늘의 현실을 그토록 안이하게 단선적으로 바라볼 여유는 없다. 지금은 그럴 상황도 계제도 아닌 것이다. 김교수의 지적대로 '지킬 재산은 없지만 몸을 바쳐가며 민주주의와 언론자유를 일궈온 '시민'에게 현실을 그렇게 안이하게 바라보도록 요구하는 것이 실천적 지식인의 역할인가?

Ⅲ.
사실 나는 '시민의 소리'(8월 20일자 1면)에 실린 언론사주 구속에 대한 각계 의견기사(김 교수의 논평이 포함된)와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8월 11일자 칼럼을 뒤늦게 읽지 않았다면 이런 글쓰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임교수의 비판에 정당성이 있다고 보았고, 또 김교수도 다시 의견을 내놓아 자신의 논지를 옹호하고 변명함으로써 어느 정도 정돈되는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교수는 그 후 다시 '시민의 소리'를 통해 '시민단체' 쪽의 '언론사주 구속이 당연하다'는 반응과 달리 '방법이 세련되지 않았다' '정부가 너무 극단적으로 막 가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언론사에서 오욕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며 자신의 첫 번째 글과 비슷한 논지를 반복했다. 김교수에게 시민단체는 여전히 '기생자'의 위치로 규정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게 한 것이다.

'사주를 구속한다고 조선일보가 바뀌겠느냐'는 김교수의 지적은 옳다. 그렇기 때문에 사주의 구속까지 몰고 온 언론사 비리(탈세와 불공정 거래)를 언론인과 시민들이 언론개혁의 계기로 삼아 완결시켜나가자고 제안했어야 하지 온당하지 않을까. 김교수가 여전히 시민과 언론에 대한 객관적 관찰자로서만 서 있기를 희망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문제의 핵심인 이들 신문의 편집방향의 혁신을 시민사회의 힘으로 강제해보자는 운동에 참여할 의사가 있다면 말이다.

언론사 세무조사와 관련하여 김교수가 그토록 강조하는 언론개혁의 주체설정 문제는 역설적이게도 김주필의 칼럼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공은 정권의 손으로'라는 글에서 그는 '정권이 간과한 것이 두 가지 있다'며 그 가운데 하나로 많은 기자들로 하여금 '바로 서야겠다'는 생각을 다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더불어 그는 '우리는 그 동안 권력과 언론 사이에서 적당히 편승해온 감이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민들이 언론사 세무조사 결과로부터 챙기고자하는(챙겨야 하는) '언론인 효과'가 아니겠는가.

김교수의 주장대로 언론개혁이 언론인과 시민의 몫이라고 한다면, 시민단체의 끈질긴 노력과 함께 바로 정부의 세무조사가 '언론인 각성 효과'를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세무조사의 정치적 함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권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이미 세무조사의 결과는 시민들이 요구하는 '언론의 변화'를 추동하는 쪽으로 기능 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겠냐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단체'를 '시민'과 분리하여 지배 블록의 한 파트인 '기생자'로 몰아세우는 것은 곱씹어 다시 살펴보아도 역시 적절한 논거는 아니다.

김교수는 재반론 글에서 시민단체(구체적으로는 임교수)에게 주문하였다. '포용력을 가지고 동지들을 규합해야 한다'고. '자기논리와 행위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는 행위는 표류와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고. 맞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이번엔 김교수에게 주문하고자 한다. 시민단체의 언론개혁운동 방식이 혹여 김교수의 의견이나 태도와 다소 다르더라도 시민단체를 '정권의 홍위병'이나 시민투쟁의 과실을 따먹는 '기생자'로 치부하는 논리에 가담하지 말 것을. 보다 적극적으로는 '근육의 작동'을 추동함으로써 포용력 있게 동지들을 규합하는데 나설 것을.(결례가 될지 모르지만, 이 '포용력'에 관한 한 '근육질'의 임교수가 '두뇌질'의 김교수에 대해서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전선은 분명해야 하지만 전술은 유연해야 한다. 분명한 전선은 가담자들의 치열함과 진정성으로부터 발현한다. 지금껏 우리 역사는 '시민'에게 만만한 현실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언론개혁을 요구하는 '근육질 지식인'과 시민들의 '죽 쑤기'는 계속돼야 한다. 시민들은 '두뇌질' 지식인에게 이 '죽 쑤기' 운동을 폄하하거나 딴지걸도록 권리부여를 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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