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샅길 지나 언덕 넘으니 아! 분홍빛 낙원
고샅길 지나 언덕 넘으니 아! 분홍빛 낙원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8.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열대야의 밤이 계속되는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그곳은 낙원이 될 수 있다. 불어오는 바람의 청량함과 코끝을 스치는 싱그러운 풀 내음이 있고 물소리 더욱 또렷하여 마음까지 씻어 주면 이것이 낙원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지금 명옥헌에 가면 그런 낙원을 만날 수 있다.

혼탁한 세상에는 벌레처럼 움추렸다가
깨끗한 시대에는 봉황처럼 날고자했던
조상을 추모하듯 연못에 꽃잎 뚝뚝...


1400평이 조금 못되는 명옥헌은 전남 담양군 고서면 산덕리 후산마을 제일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을 가려면 우선 산으로 둘러 쌓인 망월동을 지나 고서사거리에서 곧장 옥과 쪽으로 직진하여야 한다. 1㎞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명옥헌이라는 밤색 표지판이 보이는데, 그곳 시멘트길을 따라 400m쯤 들어가면 후산마을이 성큼 눈앞에 다가온다. 그곳 입구에서 마을과 몸을 섞고나면 노거수 몇 그루와 감나무들이 눈앞을 어지럽힌다. 그곳의 단감을 쉽게 보아선 안된다.
전국 최적지라고 정평을 받은 단감재배지의 단감나무일 뿐만 아니라, 이곳 마을사람들의 이런저런 인생살이의 고단함을 지탱시키는 주 수익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여튼 그렇게 감나무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따라서 구불텅한 고샅길을 가다보면 샘 하나가 나온다. 그리고 곧장 나타나는 작은 언덕을 넘어가 보라. 이 때 초록과 붉은 기운을 부리며 나타나는 그 낙원에 취하고야 말리라. 그러나 이 말에 현혹되지 말고 그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길 바란다.

바로 그곳 마을에서 한 조선의 선비가 성장하면서 뜻을 세우고 자연과 벗하며 학문의 즐거움을 삶의 즐거움이라 여기면 살았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드러난 그때는 광해군이 폭정을 일삼던 시기였다. 광해군을 제거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뜻을 세운 능양군(훗날 인조)은 거사를 도모할 지사를 모집하러 전국을 다니다 그를 만나러 기다란 은행나무에 말고삐를 메어두고 망재라는 서실을 찾았다. 하지만 명곡은 곡진하게 그의 청을 거절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다시 찾은 능양군에게 그는 나주의 한 선비를 추천해 주면서 노모를 봉양하며 살겠노라고 말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왕이 된 능양군이 그를 불렀을 때 알성시라는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세상에 나아갔다. 하지만 돌연한 병으로 인해 이 세상에 뜻을 펴려다가 그만 목숨을 마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을 애닮아한 막내아들 오이정이 아버지가 거닐었던 골짜기에 정자를 짓고 아버지를 추모하며 학문을 이었던 곳이 바로 명옥헌이다. 그렇게 후손들은 정자의 좌측으로 흘러오는 계곡의 물을 받아 건물 앞쪽과 뒷쪽에 원형의 섬을 둔 네모형태의 연못을 만들었으며 주변에 소나무와 배롱나무를 심어 두었는데 그 배롱나무가 분홍색의 꽃을 활짝 피운 것이다. 혼탁한 세상에는 벌레처럼 움추려 있다가 깨끗한 시대에는 봉황처럼 날고자 했던 명곡 오희도를 추모하듯이 말이다.

정자의 현판이 명옥헌이라고 한 것은 왼편으로 바위를 타고 흐르는 계류의 물소리가 마치 옥구슬이 부딪히는 소리와 같이 맑아서 이름을 지었다. 또 다른 이름으로 삼고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는 인조가 왕이 되기 전 명곡을 찾았던 일을 삼고초려에 빗대어 지은 이름이다. 왼편 언덕으로 오르면 개울가의 얕은 바위 위에 명옥헌 계축이라는 한자가 쓰여 있다. 우암 송시열이 남긴 글이라고 한다. 그리고 눈을 들어 산자락을 보면 멋진 가지를 지닌 반송이 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연못의 물이 탁한 것은 아직까지 문화유산은 건물 자체만 중요하다고 여기고 그 주변 환경은 생각하지 못하는 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푸르딩딩한 연못에 떨어진 선연한 꽃을 바라보았던 몇해전의 모습이 다시 살아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옥의 티로 남는 곳이다.

마을의 다른 골목 막다른 길에 인조가 말을 걸어 두었다는 인조대왕계마행수라는 나무가 세월을 이기고 서 있다. 그 옛적 한 선비의 삶을 기억하면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