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1)
길 위의 호남 선비,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1)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7.11.1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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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1592년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호남은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초토화되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 당하자, 왜군은 7월16일에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전멸시켰다.

이후 왜군은 전라도부터 쳐들어가서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8월 18일에는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전주에서 왜군은 군사를 나누어, 우군은 서울로 진격하고 좌군은 전라도 전역을 점령했다. 왜군은 전라도 백성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코를 베어갔으며 포로로 끌고 갔다. 한마디로 전라도는 아비규환이었다.  

다행히도 9월 16일에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여 일본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다. 이후 이순신이 군산 근처 고군산도로 진영을 옮기자, 왜군은 보복이라도 하듯 무안·해남·영광·함평 등 전라도 일대를 초토화시켰다.

▲ 강항 초상화

9월 23일에 수은 강항(1567∼1618) 일가는 영광 앞바다 논잠포(영광군 염산면)에서 일본 수군에게 잡혔다. 형조좌랑 강항은 정유재란 때 고향 영광에서 휴가 중이었다. 그는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성 군량미 운반을 담당했으나 남원성이 함락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지만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모두 다 흩어지고 말았다.

9월 14일에 배를 탄 강항 일가는 이순신 휘하에서 싸우기로 하였는데, 뱃사공이 21일 밤에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강항 부친이 탄 배와 헤어지고 말았다.

23일 아침에 강항 일행은 부친을 찾아 논잠포로 향했다. 갑자기 왜군 수군이 나타났다. 강항 일가는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바닷물이 너무 얕아서 왜군의 갈고리에 구출되었다. 이 와중에 강항은 두 아이가  바다에 내던져지는 아픔을 겪었다.

강항은 일본 수군 장수 도도 다카토라의 부하 노부시치로(信七郞)에 의해 일본 시코쿠(지금의 에이메 현) 오쓰(大洲)성에 억류되었다. 얼마 후 그가 주자학자라는 신분이 알려지자 일본 측의 대우가 변했다. 강항은 금산  출석사(出石寺)의  승려 요시히도(好仁)와 교류하였고, 그에게서 일본의 역사, 지리 등을 알아냈다.  

이후 강항은 1598년 9월에 오사카를 거쳐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후지와라 세이카(1561∼1619)와 아카마쓰 히로미치(1562∼1600)를 만났다.

상국사의 승려였던 후지와라 세이카는 에도 유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하리마 영주인 아카마쓰 히로미치는 주자학을 좋아하여 조선 의례에 따라 삼년상을 치른 사무라이였다.

세이카는 히로미치에게 진언하여 강항에게 유교 경전 필사를 부탁하였다. 이것이 바로 사서오경에 대한 일본 최초의 주자 주석본인『사서오경 왜훈(倭訓)』이다.  

『간양록』을 보면 강항은 은전을 좀 벌어서 귀국할 배를 마련하고자 왜승 세이카에게 글씨를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강항은 주자학에 대한 세이카의 열의에 감탄해 그에게 주자학을 가르쳐주게 되었고, 예법에 대하여도 많은 것을 전수하였다.

강항은 포로 생활 중에도 왜국의 기밀을 파악하여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는 1598년, 1599년에 세 차례 적중봉소(賊中封疏)하였는데 이 중에서 명나라 사신 왕건공에게 보낸 것이 조정에 도달했다. 1599년 4월 15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1600년 4월 2일 강항은 세이카 등의  도움을 받아 가족, 동료 등 38명과 함께 교토를 출발하여 5월 1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일본에 억류된 지 2년 8개월만의 일이었다.

귀국한 강항은 일본에서의 환란생활을 기록한 『간양록(看羊錄)』을 남겼다. 간양은 중국 한나라의 소무(蘇武)가 흉노의 포로가 되어 19년간 양을 치는 수모를 겪었다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

한편, 강항은 일본인들에게 절의를 지킨 선비로 알려졌다. 1607년에 회답겸쇄환사로 일본에 간 부사 경섬은 『해사록』에서 ‘왜인들의 말에 의하면, 강항이 포로 되어 온 지 5년 동안 자신의 바탕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의관도 바꾸지 않고 방에 조용히 앉아 책이나 보고 글을 짓기만 일삼았다’고 기록하였다.   

일본에서 강항은 ‘일본 주자학의 아버지’로 불리는데, 일본 에미메 현 오쓰 시 시민회관 앞에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져 있다.  

2017년은 정유재란 7주갑이다. 그런데 우리는 정유재란을 잊고 산다. 수은 강항 또한 역사 속에 묻힌 인물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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