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4)
더불어 ‘정의롭고 관용하여’ 함께 가자(4)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10.18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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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일제시대에 유명했던 월북작가 이태준은 단편소설 「복덕방」에서 세 노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중 ‘지금은 중개업자도 많이 늘었고 건양사 같은 큰 건축회사는 당사자끼리 직접 팔고사고’라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건양사가 정세권의 건축회사였다.

건양사는 설계팀과 시공팀을 갖추고 주택건설, 주택임대에다 주택중개 영역까지 확보한 상당한 규모의 회사였다. 1936년의 매일신보는 정세권을 신흥 자본가로 소개하면서 일반 아낙들까지 익히 아는 회사라고 말하고 있다.

정세권은 경남 고성의 면장 출신으로 상경하여 1920년 대규모 근대식 한옥단지 개발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 삼청동, 가회동, 익선동, 혜화동, 서대문, 왕십리 등에 개량식 한옥주택단지를 개발하였다. 일제통치로 가세가 기울어진 귀족들이 토지를 대거 시장에 내놓았는데, 정세권은 이를 매입, 개량한옥 집단지구로 개발하여 건축재료의 평준화와 규격화를 통해 건설비용을 절감하여 싼 가격의 주택을 공급하면서도 그 편리함을 크게 제고하였다. 지역민들의 상경러쉬에 부응하여 국산애용 열기에 편승하여 단시간에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물론 사세확장이 손쉬운 것은 아니었다. 자금대출에 불이익을 안아야 했고 동양척식회사와 토지매입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더욱이 좌파청년들은 조선인 자본가들의 성장이 유산계급의 이익만 증대시킨다고 비판하고 공격함으로써 광범위한 소비자대중을 이탈시켰다.

총독당국의 견제와 좌파의 양면공격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염가세일을 행하기도 하였다. 물산장려회사인 「장산사」를 설립하고 「장산」이라는 잡지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1929년 3월 건양사와 조선일보가 공동으로 ‘주택설계도안 현상모집’을 주최하기도 하면서 ‘건양주택’이라는 기존의 한옥의 문제점을 개선한 새로운 한옥 브랜드를 내놓기도 하였다. 놀라운 개발 속도를 보여주는데 창신동 651번지 나대지에 불과 한 달 사이 37채의 한옥을 건설하였다. 이런 것들이 건양사의 경쟁력이었다. 정세권 본인은 1929년 「경성편람」에서 매년 300여 호 씩을 방매했다고 밝히고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건양사가 잘 나갈 때, 정세권의 개발지역은 청계천 이북 대부분과 경성 외곽지역에 걸쳐 분포했다. 도시개발에 그의 민족의식도 작용했던 것 같다. 일본인의 북촌 진출을 막는 가운데 ‘사람 수가 힘이다. 일본인의 북진을 막아야 한다’는 인식이 조선인 거주의 북촌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은 조선물산장려운동과 조선어학회 지원에까지 미처 일제의 요주의 인물 리스트에 오르게 되었다.

식민지 조선의 칼자루는 일제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정세권은 민족운동에 있어서 경리와 재무이사로 조직의 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는데, 신간회 역시 그 하나였다. 서슬퍼런 일제시대, 정부의 인허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동산 사업가로서는 사업의 금기를 건드린 셈이었다.

1929년의 물산장려운동의 재기에 대해서 한국인 최초의 법학교수인 최태영의 증언이 있는데, ‘경상도 사람 정세권이 와서 이(물산장려운동)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고 했다. 일제가 주목하니 위험한 노릇이어서 법을 아는 내가 나서서 법망을 비켜가며 친일을 피하고 징역 안 갈만큼이라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까지 일제의 예봉을 피할 수는 없었다. 1940년대 초반 일제에 의해 건축면허를 빼앗기고 뚝섬일대의 대규모 토지를 대화숙 건축용으로 강탈당하고 경제사범으로 몰려 건양사의 사세는 빠르게 위축되었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의 저자 김경민 교수에 의하면, 정세권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모든 민족운동을 함께 한 평생 동지는 1920년대 민족언론의 사표였던 민세 안재홍과 조선어학회의 실질적 기둥이었던 고루 이극로였다. 안재홍은 1924년부터 1932년까지 조선일보사 주필과 사장을 맡으면서 많은 사설과 시평들을 썼다. 정세권의 건양사가 1929년과 1930년에 조선일보에 광고를 집중적으로 게재한 것은 조선일보의 경영을 도우려는 의도였다. 안재홍은 신문사 경영이 어려워지자 고향의 논밭을 팔아 신문사의 빚을 갚고 직원들의 밀린 봉급을 지불하기도 했다. 안재홍의 삶을 통해서 물산장려운동과 의열투쟁만이 아닌 민족운동을 살펴보기로 한다.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방법은 결코 순정적 외길만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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