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보다 사람, 걷고 싶은 광주(4) 부산 근대사의 아픔을 걷다
차보다 사람, 걷고 싶은 광주(4) 부산 근대사의 아픔을 걷다
  • 문상기, 박용구 기자
  • 승인 2017.08.2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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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감천문화마을~아미골비석문화마을~임시수도기념거리
걷고 싶은 거리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다. 잘 만들어진 ‘걷고 싶은 거리’는 피곤한 도시민들에게 쉴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도 하거니와 지역의 랜드마크로 도시경쟁력을 제고할 수도, 관광문화자원으로 외지 관광객들을 유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최근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 홍보하는 지자체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알려진 서울로7017, 인천 자유공원길, 부산 근대 역사의 길, 경주 삼릉 가는 길, 대전 시청 앞 가로수길, 강릉 월화거리, 미국 롬바드 스트리트, 하이드 스트리트, 기어리 스트리트, 헐리우드 블루버드, 로데오 드라이브, 산타모니카 블루버드 등 국내외의 거리를 직접 현장 취재할 계획이다. 그래서 이들 사례의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고 분석해 광주만의 특성을 담은 거리를 만드는데 일조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부산이 임시수도로서의 역할을 시작한 8월 18일, 감천문화마을을 찾았다. 오늘은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감천문화마을과 아미골비석문화마을, 임시수도 기념거리를 걸어볼 참이다. 2016년 180만 명의 관광객이 이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부산 관광공사의 도움으로 문화해설사 한 분을 소개받았다. 이날 오후 4시 감천문화마을 안내센터에 도착하니 서보성 문화해설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준다. 늦은 시간까지 친절하게 안내를 해준 서 선생님에게 지면을 통해 감사를 전한다.

감천문화마을은 태극도마을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1948년, 교주인 조철제는 본부를 부산시 보수동으로 옮기고 태극도라는 명칭으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서보성 해설사는 “1955년, 조철제 교주가 3천 세대 약 6500여 명의 신도들을 부산시 감천동으로 집단 이주시켜 도인촌을 건설하였다”면서 태극도마을이라 불리게 된 연유를 설명했다.

이어 그는 “1958년 조철제가 사망하자, 태극도는 조철제의 아들인 조영래(趙永來)의 구파와, 조철제의 사망 직후 잠시 종단의 책임직인 도전(都典)을 맡았던 박한경(朴漢慶)의 신파로 분리되었다. 도전은 금고지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박한경의 신파는 그 후 서울로 이전하여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라는 별도의 종단을 설립하였다.

감천마을 하늘마루에서는 파란색 지붕의 태극도 대강전을, 또 ‘어린왕자’가 앉아있는 곳에서는 아파트 인근에 조성된 조철제 교주의 묘를 볼 수 있었다.

2009년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로 첫발

감천문화마을의 시작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보성 해설사에 따르면 감천마을은 빈집이 30%가 넘을 정도로 고령화와 공동화가 심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이에 지난 2009년 지역예술단체인 ‘아트팩토리인다대포’가 문화관광부 공공미술프로젝트에 ‘꿈을 꾸는 부산의 마추픽추’가 선정되면서 지원받은 1억 원이 10개의 작품으로 탄생하면서 첫발을 뗐다.

2010년 다시 ‘미로미로 골목길 프로젝트’로 국고보조금과 시.구비를 합쳐 2억3천만 원을 들여 골목길 재생에 나섰다. 2011년에는 주거환경 개선사업, 커뮤니티센터인 ‘감내어울터’와 ‘감내카페’ 조성. 2012년에는 공영주차장, 작은박물관, 조명시설 등 지역특화사업 등이 진행됐다.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작가들을 입주시켜 2015년부터 올해까지 21개의 작품이 더 설치되는 등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감천문화마을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갖는 세계적인 마을로 부상했다. 르몽드지, CNN, 알자지라 방송 등 해외 언론 및 방송에서 여러 번 소개되었고 중국 충칭시에서 열린 세계도시 정상회의 때 발표되기도 했다.

또한 이곳의 풍광을 보기 위해 디 오니시오 곤잘레스(세계적인 건축가), 올리베티(슬로시티 사무총장), 후동성(중국 청화대학 부총장), 사이키 타카이토(고베 부시장), 사토 마사루(아시아 도시 경관학회장) 등 세계적인 저명인사들도 다녀갔다고 한다.

이와 관련 서보성 해설사는 “처음 입주했던 작가들마저도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을 줄 몰랐다고 한다”면서 “6.25전쟁 피난민이 산비탈을 개간해 집을 지음으로써 만들어낸 곡선의 부드러움과 아직까지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주거지 등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요소로 방문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멋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지은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 질서정연하고, 일조권을 해치지 않도록 배려한 부분도 또 다른 매력”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풍광이 가장 큰 매력

입구부터 삼삼오오 무리를 지은 관광객들로 붐빈다. 한복과 교복을 빌려 입은 관광객들도 간간히 눈에 띈다. 예술가들의 작품이 설치된 곳에 이르러서는 어김없이 포즈를 취한다.

입구에 가까이에 있는 ‘골목을 누비는 물고기’, ‘포도가 있는 풍경’, ‘감천아리랑’(작은박물관) 등은 2012년 작품들이다. 감천아리랑 내부로 들어가니 감천마을의 역사가 흑백사진 위에 펼쳐지고 있었다. 모진 삶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서 뭉클해진다.

이어 하늘마루에 올랐다. 하늘마루는 전망대다. 하늘마루에 서니 감천문화마을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1950년대에 이 모습을 봤다면 가슴이 먹먹했을 터인데, 2017년에 보니 색다른 멋으로 다가온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고 나니, 사람들이 자주 찾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이곳에서 서보성 해설사는 파란 지붕이 많은 것에 대해 “외국인들이 파란색 지붕을 보고 매력이 있다고 말들을 한다”면서 “집이 작다보니 자기 집 지붕을 파란 페인트로 칠하고 남는 것을 이웃과 나눠쓰다보니 파란색 지붕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마을에 애경사가 있으면 양동이를 돌렸다. 그러면 그 양동이에 이웃주민들은 없는 살림이지만 계란도 넣고, 밀가루도 넣고 하면서 애경사를 치르는 따뜻한 공동체를 형성했다”고 덧붙였다.

추억과 소망의 엽서, 꽤 인기

하늘마루 바로 아래에는 추억과 소망의 엽서를 부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꽤 인기가 있는 곳이란다. 감천마을의 풍광을 담고 있는 사진엽서에 편지를 써서 보낼 수 있는데, 일반 엽서와 느린 엽서로 나뉘어져 있었다. 느린 엽서의 경우 엽서를 써서 안내데스크에 가져다주면 1년 뒤에 도착한다고 한다.

하늘마루에서 내려와 다시 언덕을 오른다. 길 좌우로 커피, 음료, 액세서리, 기념품, 먹거리 등을 파는 가게들이 이어진다.

이곳 가게들은 ‘빈익빈 부익부’란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가에 가게들은 잘 되는 편이지만, 골목 안쪽에 있는 가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평이다. 그러다보니 인기있는 업종에 몰리는 경향이 일면서 경쟁도 심해지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나이든 현지인들은 그저 사람구경하는 낙(樂)외에는 경제적 이득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일부에서는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바지를 컨셉으로 한 화분을 지난 우리가 들른 곳은 아르메니아 출신 입주 작가의 작업실이었다. 불운하게도 이날 부재중이어서 만나진 못했다. 서 해설사에 따르면 버린 물건들을 잘 활용하여 멋진 작품으로 탄생시킨다고 한다.

계속해서 작가들의 작품이 이어졌다. 벽을 가득 채운 벽화들은 포토존으로서의 기능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사랑의 자물쇠, 어린왕자, 찰리 채플린 등의 벽화는 꽤 인기가 있어 보였다. 특히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동상 옆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인기가 있다 보니 이 작품을 만든 작가가 현재 사용료 문제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왕자와 사막여우 동상, 특히 인기 많아

어린왕자가 국내외 관광객을 불문하고 인기가 있는 이유에 대해 서 해설사는 세계적인 인지도를 꼽았다. 그는 “어린왕자를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어린왕자는 국적을 불문하고 한번쯤은 들어봤을 주인공이기 때문에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승효상 작가의 독락의 탑, 위길로 판화공방 갤러리, 헝가리 부다페스트 인형박물관 등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인기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어 우리는 감천문화마을의 속내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골목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골목길 풍경은 좀 전에 봤던 큰길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었고, 나이 지긋한 노인분들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집이 먼저 지어졌고, 그 사이에 길이 생겼다는 서 해설사의 말이 피부에 와 닿았다. 길은 곧 마당이었고, 밭이었고, 축사이기도 했다. 자투리땅을 정말 잘 활용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서 해설사는 “작가들의 작품을 골목 안쪽에도 해마다 계속 설치하고 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방송이나 SNS에 소개된 곳만 가서 인증샷을 찍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 같다”면서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아픈 역사도 함께 마음에 담아 갔으면 좋을텐데”라고 아쉬워했다.

1960년 당시 인구가 3만5천명이었던 감천2동은 현재 약 4500가구에 7500여명이 살고 있고, 빈집은 15%정도라고 한다. 고령화에 따른 인구감소와 공가의 증가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연간 180여만 명이 방문하고 있는 핫(Hot)한 곳이지만, 그림자도 있다는 말이다.

핫(Hot)한 반면 그림자도

감천문화마을의 과제에 대해 서 해설사는 “아직까지는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어서 마을의 버팀목이 되고 있지만,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나면 이 마을은 점점 더 삭막해질 것 같다”면서 “20~30년 후를 대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남 광양에서 왔다는 20대 남성인 이모 씨는 “원래 있는 집들과 벽화들이 조화를 이루며 색다른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면서 “어디를 봐도 좋았다”고 말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딸과 함께 여행을 왔다는 한 관광객은 소감을 묻는 질문에 “마을이 예쁘다”고 평했다.

부산에서 왔다는 20대 조모 씨는 “색감이 정말 예뻤다”면서도 “어린왕자,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포토존에 사람이 너무 많아 짜증은 좀 났다”고 토로했다.

감천문화마을을 보고난 후 우리는 아미골비석문화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도중에 아미성당이 있어 잠깐 들렀다.

아미성당 입구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마더 테레사 수녀 대형사진이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미성당은 예전 마리아수도회의 설립자인 알로이시오 신부가 피난 온 난민들과 아이들을 위해 세운 마리아회 의원과 아미고등공민학교였다. 학교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것이 기원이 되어 1969년 아미천주교회가 설립되었고, 아미고등공민학교가 폐교가 된 이후 아미성당으로 되었다.

본당으로 들어서자 먼저 ‘천국카페’가 보인다. 이곳에서는 차나 음료를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카페 뒤편에는 천국도서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컨테이너에 붉은색과 노란색이 도드라져 예뻐 보였다. 도서관에는 신앙서적은 물론 역사와 철학, 자기계발서 등 다양한 서적이 구비되어 있는데, 아무 책이나 비치해두지 않고, 서정웅 베드로 신부가 직접 책을 엄선해서 비치한다고 한다. 도서관 아래쪽에는 깨끗한 화장실이 방문객들에게 개방되고 있었다.

천국도서관으로 이름을 정한 이유는 감천마을 주민들이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이여”라는 말들을 입에 달고 살아서였다고 한다. 현재 아미성당 신자의 80%는 감천마을 주민이라고 전해졌다.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의 공존, 아미골비석문화마을

아미성당을 뒤로하고 우리는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이 함께 살고 있다는 아미골비석문화마을로 향했다.

아미골비석문화마을은 일본인들의 공동묘지 위에 들어선 마을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지세가 가파른 산비탈이었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시절 당시 부산항이나 번화가에 살던 일본인들은 이곳에 묘를 썼다.

서보성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해방이 된 후 일본인들이 떠나고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정착하기 시작한데다가 한국전쟁이 터지자 피란민들까지 밀려들면서 부산은 포화상태가 됐고, 마침내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까지 임시거처로 사용하게 되면서 비석마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비바람 막아주고 가족들이 몸이라도 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자연스럽게 묘지석은 가옥의 버팀돌이 되었으며 집과 집을 경계 짓는 벽과 기둥, 그리고 집을 오르는 계단의 역할을 하게 됐다.

비석마을의 골목을 따라 거닐다 보니 각진 모양의 상석이나 비석들이 가파른 계단의 디딤돌로 쓰이거나 옹벽 또는 집의 주춧돌 등으로 사용된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골목에는 아미농악, 엿장수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고갯마루에는 마을지도가 있었고, 비석을 사용한 건축물 앞에는 안내판도 있었다.

서 해설사는 “예전에 이곳 주민에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이 질문에 당시 주민은 ‘산 사람이 무섭지 죽은 사람은 안 무섭다’고 말해, 인간의 삶이 얼마나 모진지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해방 직후 일본의 후손들이 간혹 성묘를 오기도 했지만, 선조들의 묘위에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발길을 끊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주민 김모(79세, 여) 씨는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거지들이 많이 살았고, 전기나 수도가 없어 공동 화장실이나 공동 수도를 사용했다”고 말한 뒤, “게다(일본 슬리퍼) 소리를 듣거나 귀신이 오는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꽤 됐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상했다.

아미골의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

이처럼 모질고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아미골의 아픔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공동묘지에 대충 집을 지어 살다보니 무허가 건물이 많기 때문이다.

주민 최모(77세, 여) 씨는 “나라 땅이기 때문에 구청에 사용료를 내고 살고 있다”면서 “사용료가 비싸다. 좀 깎아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이어 “돈을 주고 살 수도 없고, 빈집이 생기면 철거해 공원이 된다”면서 “나이는 들어가고 벌이는 줄어드는데 앞으로 살 일이 걱정이다”고 덧붙였다.

마음이 무겁다. 그냥 아미골비석역사마을이라 해도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한편, 아미골비석문화마을은 마을지도, 타일벽화, 테마 탐방로, 아미문화학습관, 기찻집 예술체험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비 12억여 원을 들여 건립된 아미문화학습관의 지하 1층은 어린이 공부방 및 작은 도서관이고, 1층은 주민체험 프로그램실, 2층은 최민식 갤러리, 3층은 마을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임시수도 기념거리, 동아대 부민캠퍼스 입구부터 임시수도 기념관 사이 500m

이어 마지막 코스인 임시수도 기념거리로 향했다. 임시수도 기념거리는 서구 부민동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입구부터 임시수도 기념관 사이 거리 500m 구간에 조성되어 있다.

입구에는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라는 입간판이 서있고, 동아대학교 구덕캠퍼스에 보관 중인 전차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 전 구간의 바닥은 석재 보도블록으로 장식되어 고급스러워 보였다. 드문드문 원형 태극문양에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라고 적힌 동판도 볼 수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훈민정음과 부조상을 배경으로 공부하는 모습의 조각상, 높이 1m의 장터 풍경과 옛 생활 도구를 새겨 넣어 전쟁 당시의 생활상을 담아 낸 부조상 등, 당시 생활상을 수묵화처럼 표현한 벽화도 볼 수 있다.

계단을 오르니 계단 중간에 피난민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으며, 거리의 끝에는 임시수도 기념관(6·25 전쟁 3년간 부산이 임시 수도의 역할을 하였을 당시 대통령 관저로 쓰였던 곳으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유품 등 150여 점의 소장품을 갖춘 역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편, 2013년 9월, 부산 서구는 ‘사람과 길이 소통하는 명품 거리’를 주제로 부산대학교병원~경남중학교 구간 임시 수도 기념관 일대 1.6㎞ 거리에 ‘대학 캠퍼스 및 임시 수도 재창조 사업’을 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수도 기념거리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면서 생기 넘치는 대학 문화를 접목시켜 새로운 도시 공간을 조성하겠다는 취지였다. 이 사업은 국토해양부의 ‘도시 활력 증진 개발 사업’으로 추진되었다.

근대 역사문화 유산을 연계해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늘려 간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부산의 감천문화마을에서부터 임시수도 기념거리까지는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이었다. 다만 감천문화마을에 관광객들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은 한편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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