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다시 말한다(8)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다시 말한다(8)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07.0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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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홍길 고문

필자는 앞서의 글에서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들이 유언비어 때문에 집단학살 당했음을 말하고 아울러 지진 이재민 구호와 치안대책의 최고 책임자들이 3.1만세운동을 과잉진압한 자들임을 지적한 바 있다. 유언비어가 민간에서 어떤 오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관이 주도, 조작했음이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민간인들이 쉽게 유언비어에 현혹되어 끔찍한 학살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은 관과 민이 함께 공유한 어떤 심리상태, 즉 가해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예상공포가 유언비어를 산출하여 엄청난 학살행위로 이어졌다고 판단한다.

콜롬비아대학교 명예교수였던 사이덴스티커 교수의 ‘도쿄이야기’에 의하면, 대지진은 1923년 9월 1일 정오에 엄습했고, 이후 사흘 동안 1700여 차례 여진이 계속되었다.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건물은 시내 전체의 4분의 3에 달했는데 화재로 소실된 것이 3분의 2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뿌리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고 경찰은 특별히 우물에 주의하라고 경고하였다.

교수의 말을 그대로 소개하면 ‘조선인에 대해서 무조건 최악을 상상하는 경향, 아니 경향이기 보다 소망은 일본 근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로 인해 학살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학교들의 역사자료에 의하면 지진 발생 다음날 사이타마현 내무부장은 ‘도쿄에서 불령선인의 망동이 있으므로 동 마을 당국자는 재향군인회, 소방대, 청년단과 일치협력하여 경계임무를 맡기 바란다’는 통첩을 전하고 있었고, 미무로 소학교의 연혁지는 9월 3일에 ‘군청에서 불령선인 경비에 관한 통첩이 있었다’고 기술하였다. 현 내 각처에서 자경단에 의한 240명에 달하는 조선인 학살 소식이 있었고, ‘오후 3시 경 불령선인이 내습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우리와 각 정․촌이 모두 경종을 울리고 본부에서도 소방조 군인분회, 청년단원, 학교직원, 관공서 담당자 등이 모두 출근해서 경계에 임했다. 불령선인의 내습에 겁을 먹고 학교 교직원도 자경단에 편성되어 잠을 자지 않고 보초를 서는 모습이었다.’ 9월 4일에는 계엄령이 사이타마 지바 두 현으로 확대되고 4일 새벽 편류촌의 자경단이 24세의 조선인을 죽창과 일본도로 살해, 이 학살에 참여한 청년은 ‘계엄령 하이므로 조선인을 체포하면 훈장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9월 8일에도 조선인을 위험시하는 의식들은 계속되고 있었다. 학교도 경찰과 관공서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을 차별하고 위험시하는 의식을 불어넣고 유언비어를 확산시키고 있었다. ‘9월 2일 가나가와에서 도쿄 방면으로 조선인이 300명 정도 무리를 지어 일본인을 보면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 ’불령선인 3000명이 다미가와를 덮치고 있다‘는 등등의 유언비어들, 그것들이 일본인들의 학살을 유발하여 6000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참살 당하였다. 관동 대지진이 초래하는 피해와 혼란의 수습수단으로 조선인들을 손쉽게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것은 사이덴스티커 교수의 말대로 일본근대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나타나는 현상인데, 그 심리적 배경은 일본인들의 가해 트라우마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가해 집단의 공포감을 강화시킨 것은 조선 사람들의 저항과 독립운동이었다. 1920년대 소위 문화통치가 그 기회를 제공하였다. 1921년 부산에서 일어난 부산부두노동자 파업을 비롯해서 경성양화 직공파업, 경성고무여직공 파업은 7월 아사동맹으로 이어지면서 전국 노동계와 일본 노동계 재일 조선인 노동계의 성원을 받고 있었다. 농민운동은 1921년부터 소작농민 운동단체가 조직되어 1922년 7월, ’소작인은 단결하라‘는 선언을 발표하면서 활발해져서 1923년에는 107개 단체로 증가하였다. 3.1운동이 보여준 전국적 민족역량의 결집은 독립운동가들을 고무하여 민족적 총력 항쟁으로 전개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되고 의사, 지사의 수준을 넘는 독립의 주체로 민중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국내의 비밀결사도 100개를 넘고 상해 임시정부의 국내조직인 연통부와 교통부도 그 활력을 획득하고 해외 독립군 조직도 70~80개를 상회하기에 이르러 2만여 명에 달하는 독립군이 각종 형태의 독립전쟁을 치르고, 의열단원들의 일본과 조선에서의 의열투쟁, 암살과 폭탄투척도 계속되는 가운데 도쿄 진공계획까지 논의되었는데, 이런 것들이 일제당국이 정보와 첩보로 인지하여 그에 대비하는 모종의 작전을 충분히 준비할 수 있었던 바, 그것이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로 나타났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그들은 1920년 간도를 초토화시킨 경신 대참살의 장본인들이었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지진 수습 책임자들은 조선통치의 경험자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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