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계절의 초혼(2)
꽃피는 계절의 초혼(2)
  • 이홍길 고문
  • 승인 2017.04.11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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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황량한 길을 걸어
▲ 이홍길 고문

1948년 4월3일을 전후로 제주 인구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3만에 이르는 인민들이 학살당하였다. 이 사건을 그냥 4‧3사태라 부르기도 하고 제주대학살, 제주항쟁으로 칭하기도 하지만, 광주 5‧18을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허위 날조한 지만원은 제주 4‧3반란사건이라고 음해하기도 한다.

제주 4‧3이 어떻게 호명되든지 간에 그 많은 사람들이 국가 폭력에 의해서 학살되었던 사실은 변할 수 없다. 전 4‧3유족회장 김두연은 “4‧3, 그 황량한 길을 걸어”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난 세월을 아프게 살아 온 유족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들이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황량한 저승길을 아직도 헤매고 있을 것만 같아 가슴이 아리다. 초혼제의라도 마련해서 위로해야 할 살아남은 후인들의 책임이 중중하다.

어느덧 69년이 흘렀다. 금년에도 제주 4‧3평화공원에서는 어김없이 추념식이 열렸다. 관계자들은 초대의 글에서 “그날의 한과 슬픔과 눈물, 그날의 꿈과 희망과 사랑으로 얼룩진 시편들을 준비하여 한 손에는 희망을 품고 다른 한 손에는 아픔을 보듬고 꽃 진 자리로 4월이 오고 있습니다. 새로운 꽃망울을 안고 그렇게 오고 있습니다”고 울먹인다. 그들의 하소연은 애통해 하면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삶의 이정표를 희망의 꽃망울로 드러내고 있다. 희망과 아픔이 함께하는 웃픈 역사를 제주 현대사의 큰 자락으로 만든 것은 세계사의 격랑이 한반도를 덮치고 제주도를 할퀴면서 시작되었다.

1947년 3월1일 기념행사가 시위투쟁으로 발전하면서 4‧3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제주 시위투쟁에 참여한 인원은 최소 7만 명에서 12만 명까지로 추산되는데, 제주시에만 3만 명이 운집하였다. 시위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였다. 이에 대한 항의로 3월10일에는 초유의 관‧민 총파업이 일어났다. 1990년에 발간된 「제주 경찰사」에 의하면 166개 기관, 단체 4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전 도민의 의지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의지는 1948년 4월3일 새벽 1시를 전후로 한라산 오름마다 봉화가 타오르면서 무장봉기로 시작되었다. 제주 남로당 소장파가 그 전위에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결코 남로당의 전략은 아니고 국가의 분단을 초래할 5·10 단독선거에 대한 위기감이 4·3투쟁의 주원인이라고 이운방이라는 당시의 활동가는 증언한다. “애국청년들은 5·10 단선에 의한 통일조국 건설의 최후 기회 상실을 개탄하며 절치액완!, 무력탄압에는 무력대항 뿐!”이 증언의 핵심이다.

앞서 조병옥 경무부장은 3·1시위 때의 사망사건을 정당방위로 발표하고 3·10 관·민 총파업에도 강경 대응하여 사태를 수습하기보다는 육지에서 경찰과 서북청년단원들을 대거 투입하였다. 서북청년단원들은 북한에서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젊은이들로 이승만 단정세력의 전위대 노릇을 하고 있었다. 공산당이라면 절치부심하는 그런 집단이었다. 미군정과 그 후견을 받는 이승만 단정세력들과 그들에 의해 고무된 친일 경력의 경찰들은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극단으로 몰아 그들의 정치적 입지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토벌대와 무장대가 협상을 통하여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무장대로 위장한 경찰은 토벌대를 습격하는 「오라리 습격」사건을 조작하기도 하고, 사태수습에 적극적인 김익렬 연대장을 “공산당의 자식”으로 모함하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거동도 또한 가관이었다. 김익렬은 해임되고 친일파의 자식임을 자랑하는 김진경이 그 후임이 되어, 이후 불법적 계엄령의 엄호 하에 제주도와 온 한라산을 이 잡듯 뒤져 죽이고 태우고 굶겨 없애는 삼광의 초토화 작전으로 삼만이 넘는 제주 인민을 학살하였다.

만주에서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학습한 초토화 작전을 조국에 돌아와서 펼치고 훗날 월남에서 그 위용을 과시하였으니 한국군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씻김굿을 곁들인 초혼제를 올려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슬픈 인간사, 슬픈 한국현대사 그리고 애처로운 제주의 역사가 비창 삼중주를 이룬다.

1948년 12월10일 세계 인권선언이 선포되었다. 미국의 막강한 영향하의 UN은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누구에게나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가 있고 타고난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있으며 형제애의 정신에 입각해서 행동“할 것을 규정하였는데, 초토화작전은 그 무슨 날벼락이었을까? 미국은 2차대전의 전범들을 재판, 심판한 주도국이었다. 빛 좋은 개살구는 원래 떫기 마련? 우리들에게는 해방이었는데 미국에게는 점령이었다. 그 간격은 땅과 하늘 사이만큼 멀었는데, 친일 경찰에게는 점령이 축복이었고 전비를 가려주는 면죄부이자 호신부였다.

반공민주주의, 후견민주주의로 터 잡은 한국 민주주의는 민주, 민중항쟁으로 그 온전함을 찾아가는데, 평양의 인민민주주의는 삼대세습으로 사유화되어 북핵으로 그 폼새를 뽐내는데 또 인민민주주의의 온전함은 언제일까? 김두연의 형님은 토벌대에 의해, 아버지는 무장대에 의해 죽었다. 4·3의 상흔은 한라산의 오름마다 제주인의 가슴마다 응어리로 남아있는데 그 해원의 출구는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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