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초서의 대가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선생 타계
행초서의 대가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선생 타계
  • 박용구 기자
  • 승인 2017.04.11 1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의 한 사람
과감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물 흐르듯 필획 구사
▲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선생

동국진체의 서맥을 잇는 서예가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선생이 92세 노환으로 지난 7일 유명을 달리하고 곡성군 죽곡면 선영에 잠들었다.

운암(雲菴)은 함안조씨의 집성촌인 전남 곡성군 죽곡면 봉정리에서 1926년 9월28일 조선초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40이 넘은 나이에 늦깎이로 송곡(松谷) 안규동(安圭東)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밤낮으로 서예술을 연마했다. 서예를 늦게 시작한 만큼 운암(雲菴)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탐구하며 착실하게 공부를 진행해 갔다. 바쁘게 서두를 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느슨하게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 운암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을 좌우명으로 삼고 그 정신을 실천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을 글씨에 묻혀 지냈다. 누우면 천정에다 글씨를 쓰고, 밥을 먹을 때도 젓가락으로 밥상에 글씨를 연습한 것으로 알려졌다. 거리를 지나다 좋은 글귀가 보이면 그대로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종이 안쪽에다 글을 적어 모으곤 하였다. 벼루의 구멍을 내고 수백 자루의 붓을 닳게 하는 연마 끝에 비로소 운암은 대가로서 일가를 이뤘다.

이후 그는 고려태조비왕후오씨유적비(高麗太祖妃王后吳氏遺蹟碑), 정절공조려선생사적비(貞節公趙旅先生史蹟碑). 장흥위씨시조회주군사적비(長興魏氏始祖懷州君史蹟碑), 진각국사유적비(眞覺國師遺蹟碑), 도갑사사적비, 경복궁현판(膺祉堂), 백양사와 도갑사 일주문 등 전국 각지에 굵직한 비와 현판에 글씨를 남겨 현대 한국 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된다.

운암은 생전에 전통을 바탕으로 예술적 정열과 불타는 창작 의지 그리고 오로지 서예에만 몰두하는 바보스럽고 우직함이 배어 있는 작품을 수 없이 발표하여 그 때마다 경향 각지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찬을 받아 왔다.

이러한 그의 창작 의지는 개인전과 국제 교류전 그리고 각종 공모전과 그룹전 등을 통하여 끊임없이 변화를 추구하는 작품 활동으로 이어졌으며, 고령의 나이에도 끊임없이 불타는 창작 의지로 서학도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운암은 국립현대미술관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예대전 초대작가, 광주시전, 전남도전 등 각종 공모전의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중국 무릉대학 명예교수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또 이 지역 문화 예술의 발전에 공헌하고 서예발전에 지대한 공을 인정받아 전라남도 문화상, 곡성군 문화상, 남도서예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한국 서예 100년전, 88올림픽 기념전, 광주 비엔날레 기념전, 한국서예 백인전, 전라남도 개도 100년 기념전, 호남 미술 100인전, 광주시립미술관 개관 기념 전국 중진 작가 초대전 등에 참여하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또한 광주비엔날레 기금 마련전, 5·18 부상자 동지회 기금 마련전, 민가협 기금 마련전, YMCA건립 기금 마련전, 노동문화제 지원전, 맹인 복지회 기금 마련전, 농아 복지회 기금 마련전, 언어 재활 기금 마련전 등 각 단체에 대한 지원과 불우 이웃돕기 기금 마련전에도 적극적으로 출품하여 이웃 사랑 실천에도 앞장서 왔다.

그는 광주 예술의 거리에서 운암서예원을 운영하며 후진을 양성하다 서예원을 제자들에게 물려주고 10여 년 전 나주시 남평읍 오계리 진옥헌(振玉軒)에서 만년을 보냈다.

▲ 운암 조용민 선생 작 정관도묘(靜觀道妙). '고요히 진리의 오묘奧妙함을 관조觀照하다'는 뜻이다.

고인을 잘 아는 서예가 김병기(金炳基) 교수(전북대 중어중문과)는 “운암선생은 전·예·해·행·초 오체를 두루 잘 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려한 행·초서가 좋다. 막힘이 없다. 막힘이 없기 때문에 시원하고 시원하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리고 자유롭기 때문에 편안하다.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 새 한 곡조의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기분에 젖는다.(중략) 운암 선생의 글씨에서는 향기가 난다. 선생이 지닌 넉넉한 인품이 글씨에 배어나와 사람의 향기가 물씬 풍겨 나온다. 그래서 보배롭다. 글씨를 걸어두고 선생의 인품을 생각하고, 또 선생이 골라 쓴 그 글귀의 뜻을 새겨보노라면 어느새 편안하고 자유로운 선생의 글씨 속으로 빠져 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생의 글씨를 좋아하는 것이다. 조용민의 서예술의 세계는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거기에 안주하지 않는다. 과감하지만 지나치지 않고 물 흐르듯 필획을 구사하지만 협곡과 폭포를 이루는 듯 조금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없이 자유분방하다. 마치 동국진체를 이룬 원교 이광사의 묵적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고인은 운암서예원 제자들로 구성된 일묵회(一墨會)를 통해 매월 월례회시 부여한 공부과제 중 우수작을 표창하고 한 획 한 획 글씨 지도를 통해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대한민국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애일당 김효순을 비롯하여, 우계 조병춘, 목인 곽서흠, 연재 조송래, 마천 김현웅, 수현당 김영혜, 하곡 서경종, 하림 김국상, 고암 송경무, 한솔 임형, 죽오 김두수, 석현 이준형, 담현 서동국 등 국전과 시전, 도전 등에서 초대작가로 활동하는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들은 매년 일묵회전을 열어 운암의 서맥을 이어가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