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홍성담, ‘세월오월’ 누구에게 외압 받았나
[단독]홍성담, ‘세월오월’ 누구에게 외압 받았나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7.03.28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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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문체부, 국정원 외압 동시에 작동된 것”

[시민의소리=김다이 기자] 3년 전. 세월호 침몰이 있었고, 무능력한 정부를 풍자한 홍성담의 ‘세월오월’ 작품도 세상 밖으로 빛을 보지 못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청와대 지시로 문체부가 작성한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밝혀졌다.

문화·예술을 검열한 그 대표적인 예로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에서 걸리기로 했던 ‘세월오월’은 박근혜 정부의 심기를 건들여 ‘전시불가’가 됐다.

그리고 1073일 이후 세월호가 수면위로 올라오고, 마침내 ‘세월오월’ 작품 역시 시민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시민의소리>는 전시기간동안 광주에 잠시 머물고 있는 홍성담 작가를 만나 ‘세월오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 세월오월, 결국 3년 만에 세월호가 올라온 것처럼 3년 만에 전시하게 되었다. 소회가 어떤지.

- 여러 가지 우연치고는 너무 필연 같다. 너무 우연이다 보니까 필연적으로 이런 일들이 닥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든다.

사건 당시 광주시민들의 반응이라든가 시민단체들, 5월 단체들이 발언한 내용들, 지역 언론사들의 심층취재가 ‘세월오월’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고,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고 광주 문화계를 넘어 한국 문화계 전반에 관한 일로 환치를 시켜내는 모습을 보면서 충분히 하고 싶은 이야기, 사건의 중요성, 향후 어떤 파장을 일으킬 것인가 예측까지도 다루어 주신 것 같다.

어쨌든 비엔날레는 개막식을 앞두고 논란을 종식시켜야 했고, 성공적으로 개최가 되어야 했다. 저는 전시철회 기자회견을 끝으로 작품을 내렸다. 이 사건은 언젠가 우리가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그 당시 굉장히 홀가분하게 기자회견을 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광주시민들, 상황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했던 시민단체 등 광주의 힘이 결국 ‘세월오월’ 전시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3년간 맹골수도로 들어간 세월호가 국민의 힘으로 떠오르듯이 이 그림도 광주의 힘으로 전시장에 가져다 놓을 수 있었다고 본다.

▲윤장현 시장이 지난해 11월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김종 차관의 영향력이 미친 것이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사자는 전혀 그런 적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시무산의 결정을 내리게 한 사람은 실제로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 당시에도 확증은 없지만 ‘감지’를 했다. 청와대 차원에서는 정무적인 외압, 문체부 차원에서 각종 예산 관계를 앞세운 외압, 공안 기관 차원에서 국정원의 외압이 그 당시 광주 ‘세월오월’ 사건에 동시에 작동한 것으로 본다.

故 김영환 수석 비서관 비망록을 보면 세월호 사건이 한참 진행되는 그 시기, 7월말에서 9월초 사이에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제 이름이 14번이 거론됐다. 전방위적으로 외압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비엔날레 직원들에게 전화가 와서 시장 차원의 외압을 넘어서 중앙 최고 권력으로부터 오더가 떨어지고, 국정원 직원들도 비엔날레를 유수로 드나들고 있다. 굉장히 직원들이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작업했던 ‘메이홀’근처에는 통유리로 된 커피숍이 있는데 작업실로 드나드는 것을 지켜보는 모습도 감지했었다.

▲처음 윤장현 시장과 어떤 인연을 맺었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80년대 윤장현이라는 사람을 만나서 같이 일을 했다. 그 당시 윤장현 시장은 의사였고, 저는 활동가였다. 제가 90년도에 감옥에서 나와서 인권 광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활동을 했었다. 광주에 제대로 된 최초의 시민단체인 시민연대모임을 같이 만들었다.

5월 운동만 가지고 모든 일을 할 수가 없다. 5월은 당사자 운동이 되어서 시민들로 외면을 받기도 했었다. 양심적인 광주의 작은 기업가부터 시작해서 변호사, 의사, 교수들, 예술가들이 모여서 시민연대모임을 만들었다. 거기서 사람을 끌어오는 일을 윤장현 시장이 했고, 시민운동을 했었다. 그래서 더 존경했었다. 그리고 정치권으로 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매번 반대를 했었다. 시민사회의 대부로 남길 바랬다.

어쨌든 현재 광주의 살림살이를 책임지고, 시정의 책임자로서 한 끼를 굶더라도 광주시민들과 광주의 자존심을 선택하라 하고 싶다. 바로 이것이 자칭 시민후보라고 나왔던 시장에게 기대를 걸었던 부분이다.

시장의 자리는 외롭게 결단을 내려야하고,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 시민후보답게 시민운동가답게 시정을 앞으로 이끌어가지 않으면 커다란 암초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정치가 출신의 시장과는 다르게 블랙리스트가 터지니까 김종 차관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고백한 것은 하기 쉽지 않은 결단을 보여줬다. 앞으로 광주의 정치 지도자들이 새로 들어서고 바뀔 텐데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광주시민사회와 함께 결정을 내리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 관료들 속에 쌓여서 관료들의 이야기만 들으면 실패한다. 특히 공공의 일은 시민사회와 함께 토론해가고, 협조를 얻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더 귀담아 듣고 정책을 판단해야 한다.

▲이번 전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신다면.

-세월오월과 관련된 ‘닭’ 형상이라든가 ‘박정희’ 형상이라든가 그리고 지난해 7~8월 2달간 완성한 세월호 그림을 담았다. 세월오월은 수정요구 전 원본 자체로 전시된다. 수정했던 닭 그림과 박정희 계급장 부분은 따로 캔버스에 전시를 한다.

앞으로 새로운 작가들, 젊은 작가들이 나와서 연작으로 세월호를 다뤄줬으면 좋겠다. 카툰 비슷한 그림들로 노란 리본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고, 종이배 수준만 그리고 있다. 고통을 직면한 그림들이 없다. 아이들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었던 그 찰나의 순간에 아이들이 어떤 고통을 가지고 갔는가 그 아이들이 남긴 마지막 말은 무엇이었을까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왜 배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선수가 나와 있는 그림만 그리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고통을 참았던 지옥 같은 속으로 같이 상상력이 들어가 줘야 한다. 그것이 화가고 예술의 힘이다.

작업실에서 유족들과 다과회를 하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머니들 편에 서지 않겠다. 아이들의 편에 서서 이야기를 하겠다. 그래서 처참하고, 나를 욕할 만큼 혹독한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고통을 직면해야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야 세월호 운동이 계속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가 조금이나마 세월호 유족들의 고통과 아픔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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