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29) 한국무용가 이반야
남도의 멋을 찾아서(29) 한국무용가 이반야
  • 박창배 기자
  • 승인 2017.02.16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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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용을 시민속으로, ‘익숙한 느낌’ 그대로
▲ 한국무용가 이반야

한국무용을 일반시민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춤꾼이 있어 만나보았다.

한국무용가 이반야씨는 우리나라 대표 민속춤의 하나인 승무로 제24회 전주대사습놀이 무용부에서 장원을 받았다.

시인 조지훈의 ‘승무’라는 시는 유명하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하는 시는 승무를 추고 있는 여인네의 춤동작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시라기 보다는 한편의 그림을 그려냈다.

그가 한국무용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이다. 초등학교에 한국무용반이 생기자마자 열성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저 춤이 좋아 시작했던 한국무용이 중학교 1학년 때 지금의 스승인 김덕숙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한국무용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승무’와 ‘살풀이’를 배우게 됐다.

호남승무를 잇고 있는 이매방류 승무를 김덕숙 선생에게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승무를 배우면서

고명딸로 예쁨을 독차지했던 어린 시절, 이씨는 춤을 추는 것을 유독 좋아 했다고 한다. “할아버지 앞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려도 혼이 날 정도로 엄했는데 제가 춤을 추면 즐거워 하셨다”면서 “초등학교에서 춤을 출 수 있다는 생각에 한걸음에 달려갔다”고 한국무용을 접하게 된 계기를 이야기해 주었다.

한국무용을 배우면서 스승인 김덕숙 선생은 늘 절제를 강조했다. ‘많이 움직이지 마라. 가볍게 행동하지 마라. 소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고요함을 찾아라’라는 등, 한국무용의 정적인 행동은 이씨의 몸에 익숙해지게 됐다.

중고등학교시절 춤을 배우는 과정에 대해 그는 “학교 수업이 끝나거나 방학이 되면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했다”면서 “한동작이 완성될 때까지 열심히 연습을 했다”고 한다. “스승님께서 춤만 춰서는 안된다면서 영어단어, 한자를 외우게 했고 매일 시험을 치뤘다”고 연습시절을 회고했다. 또한 장구나 북 등 다른 악기들도 함께 배우도록 했다.

칭찬에 인색해 연습할 때면 꾸짖던 스승님도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받아내자 ‘잘했다’는 칭찬을 아낌없이 해주었다. 이 한마디에 그 동안의 설움이 눈녹듯 녹았다고 한다.

신무용과의 조우

살풀이와 승무는 내면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고요함 속에서 감정을 승화시키는 춤이다. 그만큼 육체적인 수련과 정신적인 수련이 병행되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신무용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표출시킨다. 역동적으로 구르기도 하고 뛰기도하고 몸을 내던지기도 한다.

이씨는 한국무용을 하다 신무용을 접하게 된 고등학교 시절 신무용의 새로운 분야에 눈을 뜨게 된다. 중앙대학교 무용학과에 입학한 이후 정신 없이 춤을 추었다.

대학 입학 이후 해외 공연도 많아 여러 나라를 다니며 한국무용을 알리기도 했다.

그런데 졸업 이후 이씨에게도 찾아온 슬럼프는 자신의 한계를 깨닫게 됐다. “스승 울타리에서 곱게 배우다가 벗어나 있다보니 내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게 됐다”면서 “1년반 기간동안 논문을 쓰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고 한다.

이렇게 성찰이 있은 후 그는 시민들에게 한국무용을 알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이는 예술정거장

2015년에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연계해 ‘움직이는 예술정거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마음치유 프로그램인 ‘움직이는 예술정거장’은 문화적 기반이 취약한 농산어촌과 섬지역을 대상으로 문화 향유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사업이었다. 예술가가 지역 주민들에게 춤 공연을 선물하고 지역 주민들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다.

이씨는 “버스를 개조해 버스 안에서 수업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공연도 했다”면서 “처음에는 시골 마을을 다니면서 하다가 성과가 좋다 보니 섬마을로 확대해 보자는 취지였다”고 했다. 그래서 병원선을 타고 진료하러 갈 때 같이 가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이씨가 춤을 가르쳐 줄 때면 다리가 아프다던 할머니도 흥에 겨워 춤을 추기도 했다.

“광주에는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다. 우리 민족은 흥을 즐길 줄 아는 민족인데 그런 공간이 부족하다”면서 “춤을 추는 공간이라고 해서 노래방이나 나이트 클럽 같은 어두운 면만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흥을 돋울 수 있는 자리가 많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외국에서는 파티문화가 있어 춤을 추는 자리가 마련되기도 하는데 우리 민족에 맞는 흥을 돋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다.

지금은 다시 김덕숙 선생에게 춤을 배우고 있다. 그동안의 자만심을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통한 신체발달과 사회성을 익히는 교육을 하고 있다. 교육이 끝나면 연습실에 가서 5월달에 있을 스승님의 작품발표회를 돕고 있다.

이씨는 “개인적으로 나만의 작품으로 발표회를 갖고 싶다”고 춤꾼으로서의 희망을 밝히고, “미술관 등 좁은 공간에서 춤을 출 수 있었으면 한다”면서 시민들에게 한국무용이 좀 더 익숙해져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으면 바랐다.

남도의 멋이란?

이씨는 아직 어린 나이지만 본인이 생각하는 남도의 멋에 대해서 “우직, 곧음, 무뚝뚝 하면서 굵고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드는데 섬세하거나 여린 느낌보다 한결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 한참 후에 돌아와서 느꼈을 때 ‘눈에 익숙한 느낌’이 가장 남도의 멋이라고 했다.

익숙한 느낌 그대로 한국무용이 시민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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