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의 직, 역사는 반복 된다
여왕의 직, 역사는 반복 된다
  • 범지훤 호남의병연구소장
  • 승인 2016.12.01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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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지훤 호남의병연구소장

우리는 최고의 군주나 장군을 ‘성군’(聖君) 또는 ‘성웅’(聖雄)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3대 태평성대의 하나인 요·순시대의 임금이었던 전설적인 군주, 요·순은 이른바 ‘성군’의 모범이다. 조선시대 세종대왕과 같다. ‘성군’의 반대는 ‘폭군’인데 중국에서는 하나라의 걸왕, 상나라의 주왕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에는 연산군이 ‘폭군’으로 지칭되고 있다. ‘성군’ 바로 다음 단계가 ‘명군’(明君)이다. 명군은 정사에 밝은 임금이란 뜻으로 조선시대 정조가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명군’의 반대 개념이 ‘혼군’(昏君) 또는 ‘암군’(暗君)인데 ‘정사에 능력 없는 어리석은 군주’라는 뜻이다.

최근의 ‘박근혜 · 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국민과 대한민국 모두에게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나라를 어지럽히고 백성을 힘들게 한 ‘혼군’은 많았다. 중국에서는 진시황의 아들로, 그 뒤를 이은 ‘호해’가 무능하고 멍청한 황제의 대명사로 꼽힌다. 당시 실세였던 환관 조고가 ‘지록위마(指鹿爲馬)’, 즉 ‘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면서 황제를 농락하였다. 강대하던 진나라가 쇠약해져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 뒤 조고에게 자결을 권하자, 당시 황제였던 조고가 체면을 살피지 않고 목숨을 구걸하다가 결국 스스로 자결했다. 그는 불과15년 만에 진나라를 멸망하게한 용렬한 군주였다. 수양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민족의 역사에서도 못난 임금들이 참 많았다. 조선의 제25대 철종은 ‘혼군’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강화도령’으로 불리며 강화도에서 은둔하며 살다가 하루아침에 왕족이라는 명분으로 일국의 군주가 된 그는 안동김씨 세도정치 아래에서 임금 노릇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일찍 생을 마감했다. 지적 능력과 판단력 부족은 물론 자신의 세력마저 없어 ‘허수아비’ 노릇만 하다 33살로 요절했다. ‘전정’ ‘군정’ ‘환곡’ 등 이른바 ‘3정’의 문란이 가장 극심해 백성들이 지옥 같은 세월을 보낸 게 바로 철종 때였다. 

우리 역사에 여성 군주는 3명 있었다. 신라 때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다. 이 가운데 진성여왕은 1천여 년의 역사를 보존해 온 신라의 사직을 지켜내지 못한 군주였다. 삼국사기 진성여왕 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진성여왕은 자신의 숙부인 각간 위홍과 ‘사통’(私通)을 한 것도 모자라 위홍이 6년여의 밀회 끝에 사망한 뒤에는 미소년 2-3명과 향락을 즐겼다. 젊은 미남자 2, 3명을 몰래 궁궐로 끌어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 간신들이 뜻을 펴게 되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벌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다.” 진성여왕은 신라 왕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며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데도 심한 낭비와 사치로 국고를 텅텅 비게 했다. 그러자 각 지방 호족들을 겁박해 세금 납세를 독촉했고 이는 호족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그러자 빈곤에 시달리던 민심도 점차 흉흉해져 양길, 궁예, 견훤 등 나라 안 곳곳에서 왕을 지칭하는 자들이 16여명이나 되었고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신라의 분열이 극에 이르자 895년 최치원은 국가개혁을 위한 ‘시무16조’를 진성여왕에게 진상했다. 진성여왕은 최치원에게 육두품에게 제수할 수 있는 제일 상위직인 아찬직을 주고 그의 개혁안에 따라 조정을 일신하고자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시무책을 통한 그의 정치 개혁안은 당시 신라의 정치 환경으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정치적 정황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내란상태가 겉잡을 수 없게 되자 진성여왕은 신하들에게,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면서 도적들이 봉기하는데, 이것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진 사람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했다.”라고 말하고, 즉위한 지 11년 6개월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자신의 오빠인 헌강왕의 서자(庶子) 요를 왕태자로 삼아 왕위를 선양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진 ‘하야’를 한 것이다. 그가 바로 신라 제52대 효공왕(897∼912)이다. 기록에 의하면 진성여왕은 그 후 해인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이 120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여러모로 신라 말과 비슷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도 진성여왕과 닮은 데가 많다. 그래도 진성여왕은 국민들이 모르는 ‘비선 실세’를 쓰지는 않았다. 각간 위홍을 비롯해 총신들이 전횡을 일삼았지만 이들은 대부분 국가로부터 공직 임명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국민 몰래 국정을 마음대로 농단해 구속 수감된 최순실의 경우와는 범죄의 질과 경우가 다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진성여왕이 최고 권좌에서 자진해 물러났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이른바 측근 몇 사람의 호위아래 국면전환을 꽤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1200여 년 전 왕조시대에도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군주는 설 자리가 없었다는 냉엄한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 처사이다.

지금은 21세기 민주공화국 시대이다. 지지율 고작 4%에 국가 최고 수사기관인 검찰에 의해 피의자로 낙인까지 찍힌 대통령이 무슨 방법으로 난국을 극복하려고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대통령이라해도 그도 인간이기에 잘못할 수도 주위의 간신들에게 속임을 당할 수 있다. 문제는 위기수습방법이다. ‘200만 촛불’에도 더 이상 버틴다면 후세 사가들에 의해 진성여왕만도 못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성여왕의 고사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간을 놓치지 말고 스스로 퇴진을 결정, 국가경제가 파탄 나고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의명분(大義名分)에 의한 ‘진퇴대국(進退大局)의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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