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20) 유학의 향기가 은은한 장성
호남기록문화유산(20) 유학의 향기가 은은한 장성
  • 나상필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6.09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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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한 자연경관, 예부터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문향 장성

산수가 수려한 자연경관으로 예부터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문향(文鄕), 선조들의 예와 멋을 느낄 수 있는 그곳으로 장성(長城)이 있다. 장성이란 이름은 노령산맥이 긴 성과 같이 북서쪽을 가로막고 있어서 이름했다고 한다.

호남 지방에서 유림(儒林)4대 고을을 꼽을 때면 흔히 광나장창이라고 하는데 광주 나주 창평 장성을 말한다. 경상도에서 안동이 선비가 많고 학문이 성한 곳인데 호남에서 뽑으라면 장성을 첫 번째로 꼽았다.
 
▲ 하서선생신도비
흥선대원군이 조선 팔도에 관하여 평을 했는데 그 중 호남팔불여(湖南八不如)”를 말했으니 인불여남원(人不如南原), 지불여순천(地不如順川),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 곡불여광주(穀不如光州),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 전불여고흥(錢不如高興), 호불여영광(戶不如靈光), 여불여제주(女不如濟州).”라 하여 호남에서 학문을 논할 때 장성을 능가할 만한 곳이 없다는 얘기다.
 
장성의 학문과 선비 정신을 말해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 서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리학의 대가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필암서원(筆巖書院)이다. 올해 하반기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원 9개소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려고 하는데 그 중 필암서원이 포함되었다.
 
구한말에 위정척사 운동에 선봉장이 되었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고산서원(高山書院), 임진왜란 때 화차를 제조한 망암(望庵) 변이중(邊以中)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봉암서원(鳳巖書院), 청백리로 이름난 아곡(莪谷) 박수량(朴守良)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수산사(水山祠) 등이 있다.
 
이처럼 장성의 학문과 정신을 알기 위해 서원을 답사하지만 서원이 아닌 금석문(金石文)을 통해 정신문화의 중심지인 장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광주에서 30분정도 차로 달려가면 장성군 황룡면에 하서김인후신도비(河西金麟厚神道碑), 난산비(卵山碑), 통곡대(慟哭臺), 필암바위가 있다.
 
김인후는 비록 벼슬은 높지 않았으나 당쟁과 사화로 혼탁한 시대를 살면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고봉 기대승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우하면서 학문과 인격을 두루 닦았다. 김인후신도비는 보면 우리나라의 인물 중에서 도학, 절의, 문장을 모두 탁월하게 갖춘 이는 찾아볼 수 없는데 하늘이 우리 동국을 도와 김인후 선생을 태어나게 했고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백세의 스승이라고 극찬하였다.
 
▲ 난산비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10년을 걸쳐 지었고, 글씨는 도암 이재(李縡, 1680~1746), 전서는 퇴어 김진상(金鎭商, 1684~1755)이 써서 1742(영조 18)에 건립되었다.  난산비는 인종(仁宗)의 기일(忌日)71일 난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요즘 옥중화라는 드라마가 한창 방영중인데 명종 때를 배경으로 인종의 독살설을 소재로 삼아 제작되었다. 인종의 스승이 김인후인데 이 드라마에서는 김인후의 모습이 아직까지 보이지는 않고 있어 안타깝다.
 
▲ 난산통곡대
인종이 승하한 후 김인후는 36세의 나이로 벼슬을 그만두고 장성으로 내려왔다. 이후 인종을 흠모하며 그리워하는 김인후의 모습을 통곡대를 통해 알 수 있다. 통곡대는 인종의 기일만 되면 김인후가 통곡대에 올라 하루종일 목 놓고 울었던 곳이라고 한다.
 
난산비와 통곡대를 보고 필암서원으로 오다보면 길 왼쪽에 나무로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필암(筆巖)이라고 써 있는 바위가 있다. 그 바위의 글씨는 윤봉구(尹鳳九, 1683~1767)가 썼다.
 
김인후는 호남 유학의 선구자로 정몽주, 조광조 등 18명의 유학자 가운데 유일한 호남의 선비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도학, 절의, 문장을 두루 갖추어 후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필암서원에서 홍길동테마파크쪽으로 5분정도 올라가면 아곡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의 묘소가 있다. 박수량은 황희, 맹사성과 더불어 조선 3대 청백리(淸白吏)로 꼽히는 인물이다.
 
▲ 박수량백비
박수량의 묘소에는 우리나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하사받은 유일무이한 백비(白碑)가 있다. 백비가 세워지게 된 배경은 명종(明宗)이 박수량의 청렴한 생활상을 알면서 묘비석에 그의 청빈한 생활을 기록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글자를 없이 세우자고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박수량은 죽기 직전에 후손들에게 고향에 장사를 지내되 묘를 너무 크게 하지도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박수량이 사망하고 330년이 지난 1805, 순조가 정혜(貞惠)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
 
백비의 오른쪽에는 박수량신도비(朴守良神道碑)가 있는데 비문은 연재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이 짓고 글씨는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썼다. 백비(白碑)를 무자비(無字碑)라고도 불리는데 중국 역사에서도 당나라 측천무후와 명나라 만력제 2명만 있다.
 
이들의 백비는 악행이 후세에 기억될까봐 아무 글씨도 남기지 않았지만 박수량은 청렴결백함을 칭송하기 위하여 글씨는 남기지 않은 점이 대비된다.
 
박수량백비를 지나 백양사쪽으로 20여분 차로 달리면 구봉산이 나온다. 그곳에 변이중유허비(邊以中遺墟碑)가 있다. 유허비가 이곳에 건립된 배경은 1576년과 1577년에 부모의 상을 연이어 당하자 구봉산 중턱에 여막을 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때마다 올라 통곡을 하여 후손들이 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망암 변이중(邊以中, 1546~1611)은 군사 전략에 밝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큰 공을 세웠고 총통화전도설(銃筒火箭圖說)’화차도설(火車圖說)’ 등을 지어 화차를 제조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기존 화차를 개량한 변이중 선생의 화차는 한 번에 수백 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어 행주대첩 승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변이중 선생은 충 학을 두루 겸비하고 위기로부터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선비로 후세에 귀감이 되고 있다.
 
구봉산에서 장성군청을 지나 동화면으로 20분정도 차를 달리면 길가에 노사위정척사기념탑(蘆沙衛正斥邪紀念塔)이 보인다. 위정척사(衛正斥邪)란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정도(正道)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한다는 위정(衛正)과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 배격한다는 척사(斥邪)운동이다.
 
▲ 노사기선생신도비
위정척사에 불씨를 당긴 사람이 노사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인데 그는 프랑스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관련된 병인소(丙寅疏)를 올렸다. 위정척사기념탑에는 병인소에 담긴 6개 조항이 새겨져 있다. 노사의 학문과 사상을 이으며 학문이 강해지던 곳이 고산서원이라면 노사의 혼이 담긴 유적지는 위정척사기념탑 주변의 신도비와 묘갈비(墓碣碑)이다.
 
신도비는 전국의 유림들이 성금을 바쳐 세웠는데 비문은 생전에 가장 노사를 흠모했던 면암 최익현이 지었고 글씨는 여초 김응현(金膺顯)이 썼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최익현이 지은 신도비의 내용이 면암집(勉菴集)과 노사집(蘆沙集)이 다르다는 것이다. 노사집에 있는 신도비는 최익현이 먼저 지은 것인데 우리나라 성리학이 전수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중간 단계를 빼고 기정진으로 바로 넘어가며 너무 극찬한 나머지 당시의 유림들에게 지탄을 받게 되어 면암집에 있는 신도비를 다시 짓게 된 것이다.
 
기념탑 주변의 신도비에 새겨진 비문은 노사집에 있는 것이다. 묘갈비는 노사의 제자 중에 영남의 학자로 가장 큰 명성을 얻었던 노백헌 정재규(鄭載圭, 1843~1911)가 짓고 하늘이 우리의 도를 도와 선생을 낳으셔 정기(正氣)를 모아 진실로 대성하였네.’라는 찬사로 노사의 높은 학문의 완성을 극찬하였다.
 
▲ 노사묘갈비
이렇게 하서 김인후 이후 기축옥사(己丑獄死) 등으로 끊어진 호남의 성리학을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기정진의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노사학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서릉(徐稜, 고려후기), 지지당 송흠(宋欽, 1459~1547), 금강 기효간(奇孝諫, 1530~1593), 송사 기우만(奇宇萬, 1846~1916) 등에게서 장성지역의 유학 전통 엿볼 수 있다. 이렇듯 효와 충, 청렴과 절의,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장성의 유학 전통은 호남 유학이 형성되고 발전해 나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장성은 호남 유학의 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서 깊고 유명한 역사유적지가 지금에까지도 많이 남아있으니 호남의 정신을 본받기 위해 기행을 떠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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