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9) 일본기행문과 『노송당일본행록』
호남기록문화유산(19) 일본기행문과 『노송당일본행록』
  • 김미선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 승인 2016.06.0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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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기행문, 송희경의 『노송당일본행록』

조선 시대 문인들의 해외체험과 일본기행문

조선 시대에 문인이 해외를 체험한다는 것은 매우 드물고 특별한 일이었다. 표류나 전쟁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상황이 아닌 일상적인 상황에서, 문인이 해외를 체험할 수 있는 대표적인 일은 공적인 사신으로서 해외에 다녀오는 것이다. 곧 연행사나 통신사로 중국이나 일본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해외체험은 아무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희소성 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 사람들은 남들이 할 수 없는 자신만의 특별한 해외체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이 남긴 기행문은 당시의 이동 경로, 문화적 교류, 타지에서의 감상 등을 볼 수 있는 귀한 기록문화유산 자료이다.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의 기행문은 통신사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송희경(希璟, 1376~1446)노송당일본행록(老松堂日本行錄), 신숙주(申叔舟, 1417~1475)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김성일(金誠一, 1538~1593)해사록(海槎錄), 황신(黃愼, 15601617)일본왕환기(日本往還記), 경섬(慶暹, 1562~1620)해사록(海槎錄), 오윤겸(吳允謙, 1559~1636)동사상일록(東槎上日錄), 신유한(申維翰, 1681~1752)해유록(海游錄), 조엄(趙曮, 1719~1777)해사일기(海槎日記)등 일본기행문은 조선시대에 꾸준히 창작되었다.
 
다양한 일본기행문 중 본 글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일본기행문인 송희경의 노송당일본행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송희경은 만년에 전남 담양으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으며, 이로 인해 담양에 신평 송씨가 세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송당일본행록은 호남인이 남긴 기록문화유산으로서, 호남기록문화유산을 발굴, 집대성, 콘텐츠화 한 호남기록문화유산 홈페이지에 그에 대한 정보가 탑재되어 있다.
 
▲ 송희경의 『노송당일본행록』 원문
송희경
, 202편의 시와 두 편의 산문으로 일본체험을 기록하다.
 
송희경은 회례사로서 1420년 일본에 다녀왔으며, 1420년 윤 115일부터 1026일까지의 일본 사행이 202편의 시와 두 편의 산문으로 노송당일본행록속에 담겨 있다. 시를 쓰는 것이 일상화되었던 조선의 선비가, 일본 사행이라는 특수한 경험 중에 시를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노정 중간 중간 감흥을 시로 쓴 것이 아니라, 10개월의 노정 전체를 시로 정리한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송희경이 이렇게 시로 일본 사행 전체를 기록한 것은 타국으로부터 돌아왔으니 시를 짓지 않을 수 없다는 세종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시는 돌아와서 한꺼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일본 사행 중에 지은 것을 세종의 명을 받은 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1025일에 서울에 들어가 세종을 만났는데, 10월 하순에 이 행록을 완성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물리적으로 며칠 만에 202편의 시를 모두 쓰기는 어렵다. 더구나 10개월간의 일을 기억을 더듬어 일순간에 작성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송희경은 일본 사행 기간 동안 작성했던 기록과 시를 세종의 명을 듣고 정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노정에 따라 일기체적으로 정리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 것이다.
 
10개월간 일본 사행을 노정에 따라 일기체적으로 전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황신의 일본왕환기(159683~1596129), 경섬(1562~1620)해사록(1607112~1607717) 등 조선 후기 일본 사행록은 대부분 노정에 따른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송당일본행록은 조선 후기 일기 형식 사행록과는 달리 산문이 아닌 시이면서 노정에 따른 일기체적 전개를 가진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을 지닌다.
 
송희경은 일본 사행을 시로 정리하면서, 함축적인 시로 표현하기에 부족한 부분은 시서와 산문으로 작성하였다. 일상 속에서 본인의 감상을 시로 쓴 것이 아니라, 일본 사행이라는 특수한 경험을 시로 쓴 것이기 때문에, 사행 과정을 알아야만 시를 이해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시는 자기 혼자 보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라는 독자가 정해져 있으므로, 작품만 보고도 알 수 있게 해야 했다. 그렇기에 노송당일본행록의 시는 제목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제목만으로 설명하기에도 한계가 많으므로, 시를 쓴 경위를 설명한 글인 시서(詩序)를 적극 활용하였다. 202편의 시 중 71편에 시서가 있어 시의 이해를 돕고, 일본에서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였다.
 
시서는 해당 시 한 편에 대한 서이다. 그러다보니 사행 전체를 정리하고 돌아보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이에 송희경은 시서로도 부족한 부분은 산문을 삽입하여 보충하였다. 노송당일본행록에는 다른 사람이 이 책에 대해 쓴 서, 발을 제외하고 송희경이 직접 쓴 산문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대마도를 떠나면서, 다른 하나는 사행 전 과정이 끝나고 쓴 것으로 경험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시와 시서로는 경험 전반을 정리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두 편의 산문을 삽입하여 일본 사행 전체를 정리한 것이다.
 
▲ 호남기록문화유산 홈페이지 <일기자료>에 탑재된 『노송당일본행록』
시서
(詩序) 속에 담긴 다양한 기록들
 
송희경은 모든 시에 시서를 쓴 것이 아니라 약 35%의 시에 시서를 붙였다.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이었지만,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더 알리고 싶은 것을 선별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시서를 통해서 작자의 의도도 파악할 수 있다.
 
시서는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노정 제시, 위기 상황 묘사, 견문 서술 세 가지 역할이 핵심을 이룬다. 이 중 첫 번째 노정 제시는 시만으로는 노정을 보여주기 부족하기에 시서에 나타낸 것이다. 일정한 기간 동안 해외를 다녀오는 기행문의 특성상 노정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송희경은 시서에 노정을 요약적으로 제시하여 독자 이해의 편의성을 도왔다.
 
또한 시서에 위기 상황을 묘사한 것이 많다. 왜구의 침략이 많은 시대였던 데다가, 대마도 정벌이 일어난 1419년 바로 다음해인 1420년의 사행인지라 두려움이 컸을 것이고, 풍랑의 위험이 도사리는 바닷길을 간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서에는 위기 상황에 대한 묘사가 여러 차례 나온다. 이 위기는 풍랑으로 인한 것도 있고, 해적으로 인한 것도 있다. 다음은 <해적을 봄[見海賊]>이라는 시의 시서에 해적과 대치한 위기 상황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볼 수가 있다.
 
조금 뒤에 우리 배가 점점 가까이 가자니, 한 작은 배가 갑자기 그 섬에서부터 우리를 향해 오는데, 빠르기가 화살 같았다. 여러 사람들이 다 말하기를, 이것은 해적입니다. 하였다. 곧 북을 치고 기()를 벌여 세우고 피리를 불며 꽹과리를 치고 갑옷을 입고 활을 잡고 섰다. 바라보니 작은 배 안에 사람들이 삼[]처럼 빽빽이 서 있었다. 우리 배는 돛을 멈추고 천천히 가면서 양예(亮倪)와 종금(宗金)의 배를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그 두 배가 오자 적선은 바라보더니 북면으로 해서 서쪽으로 가버렸다. 우리는 두 배와 함께 가서 화를 면하였다.”
 
대마도정벌 직후로 두려움이 큰 상태에서의 일본 노정이긴 하지만, 새롭게 접하게 된 견문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함축적이며 압축적인 시의 특성상 견문에 대한 감상은 표현할 수 있어도, 견문 자체를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송희경은 노정 중의 다양한 견문을 시서로 서술하였다. 다음은 <일본의 기이한 일[日本奇事]>이라는 시의 시서 전체이다.
 
이 나라의 풍속은 여자가 남자보다 배나 많기 때문에 별점(別店)에서 음란한 풍속이 크게 유행하여, 노니는 여인이 태반은 사람을 보면 나와서 길을 막고 자고 가라고 청하는데, 옷을 잡아끌기까지 한다. 점내(店內)에 들어가 그 돈만 받으면, 비록 대낮이라도 원하는 대로 따른다. 대체로 그 고을과 마을들이 모두 강과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맑은 기운을 안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자못 얼굴이 예쁘다.
또 남자 나이가 20세 이하로서 절에서 학습하는 자는 승도가 그의 눈썹을 깎고 먹으로 눈썹을 그리며, 입술에 붉은 칠을 하고 낯에 분을 바르며 채색 옷을 덮어쓰게 하여, 여인의 모양을 만들어서 거느리고 있다. 왕이 또한 미소년을 궁중에 뽑아 들여 궁첩(宮妾)이 비록 많더라도 이 소년을 가장 사랑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본받는다.”
 
맑은 강이 곳곳마다 수향을 이뤘는데 / 노는 계집 단장하고 길가에 가득하네 / 묻노니 왕궁에서 누가 제일인가 / 연지 찍고 분 바른 소년이라네[淸江處處水爲鄕 / 遊女爭姸滿道傍 / 借問王宮誰第一 / 塗朱粉面少年郞]”라는 짧은 시 너머의 견문을 시서를 통해 구체적으로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송희경의 노송당일본행록은 하마터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할 뻔 했다. 집안에서 10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일부는 잃어버렸고, 남은 것은 불타버렸다. 그런데 1597년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던 함평 사람 정경득이 일본의 승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필사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다시 송희경의 후손들에게 전해졌고, 후에 간행되어 현대에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노송당일본행록은 우여곡절 끝에 전해지게 되었지만, 현재에도 유실위험에 처한 소중한 기록문화유산들이 많다. 특히 간행되지 않은 필사본의 경우 유일본이 많아 이 하나가 사라지면 소중한 선조들의 문헌이 영영 사라지게 된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에서는 이런 문헌을 조사, 발굴하여 귀중한 자료가 유실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소중한 문헌이 사라지지 않게,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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