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록문화유산(17) 부안김씨 종중의 우반동 고문서 답사기
호남기록문화유산(17) 부안김씨 종중의 우반동 고문서 답사기
  • 호남지방문헌연구소 연구원 정옥경
  • 승인 2016.05.19 1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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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라하는 문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고장 우반동”

호남지방문헌연구소(책임자: 전남대 국문과 교수 김대현, 062-513-8033)20162월부터 호남한문고전연구실에서 호남지방문헌연구소로 개칭하였으며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하여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호남지방문헌연구소(www.honamculture.or.kr)2002년 설립되어 호남지역의 고문헌 자료를 발굴·조사·정리하고 DB화하며 연구 결과물을 출판하고 있습니다. 고문헌 자료 중에서도 핵심자료인 문집(文集), 지방지(地方誌), 문중문헌(門中文獻)을 중점적으로 조사·연구하며, 연구 결과물은 호남기록문화유산 사이트(www.memoryhonam.co.kr)’에 탑재하고 있습니다. 호남의 귀중한 자료를 집대성하고 DB를 구축할 수 있도록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자문 부탁드립니다.

 
▲유물전시관 입구 전경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의 유물 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는 우반동은 조용하고 한적한 시골 마을로 앞에는 넓은 농토와 뒤에는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이 마을은 서해 전북 부안 변산 바닷가에 인접하여 있고, 마을 입구에는 고인돌과 지석묘가 있다. 현재는 이 부근 4개 마을이꽃동네라는 생태 체험마을로 지정되어 있어서 마을 가옥의 주위에는 낮게 쌓은 돌담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에 철쭉꽃들이 활짝 피어있다. 지금은 농번기라 마을이 고요하고, 이 고문서 유물 전시관을 찾는 이들도 드물다.
 

부안김씨의 시조는 김일金鎰이며 중시조는 문정공 김구金坵이다. 김일의 증손 김경수金景修가 고려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우복야右僕射에 올랐다. 그의 아들 김춘金春이 나라에 공을 세워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책봉되었는데 이후에 후손들이 부령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부안은 1413년 조선 태종 13년 부령현扶寧縣과 보안현保安縣 두 개의 현을 합병하여 부안현扶安縣이 되었다. 현재 부안김씨의 문중문헌을 고찰해보면 부령김씨부안김씨라는 명칭을 쓰고 있는데 실제는 모두 부안김씨 문헌에 속한다.

 

중시조인 김구는 김경수의 6세손으로 고려 때의 문신이며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묘는 부안군 산내면 운산리에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대표적인 문집으로 지포집止浦集이 전해온다. 부안김씨는 소윤공파少尹公派, 군사공파郡事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보승낭장공파保勝郎將公派, 시승공파侍承公派, 좌승지공파左承旨公派 등 크게 6개 파로 분류된다.

우반동에 처음 입향한 인물은 김번金璠이다. 그의 아버지는 김명열金明說이고 조부는 김홍원金弘遠이다. 김번은 원래 부안군 건선면 주을래리에서 살았는데, 1678년경에 이곳으로 이거하여 살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후손들이 300여 년간 세거지를 형성하여 살고 있으며 일명우반동 김씨라고 일컫는다.
 
우반동은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반계수록磻溪隧錄을 집필하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 유씨들의 터와 토지를 김번의 조부 김홍원이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柳成民으로부터 구입하였다. 이들이 부안 지역에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발생한 토지 및 가옥 매매문서, 분재기, 노비매매문서와 거주하면서 발생한 호적문서 등이 다량 전해지고 있다. 일명 부안김씨우반고문서扶安金氏愚磻古文書라고 일컫는다.
 
필자는 호남의 문중문헌을 연구하다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부안김씨 종중 고문서 유물전시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이 고문서를 한번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는데, 마침 지난 5월 초 연휴가 있어 지인 몇 명과 함께 우반동으로 고문서 답사를 떠났다.
 
답사를 가기 전에 미리 전북 부안군 문화원 직원에게 전화로 유물 전시관을 관람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였다. 부안 문화원 직원은 우리에게 광주에서 오는 길과 그리고 그곳을 관리하는 종부께서 농번기라 집에 계시지 않을 수 있다며, 직접 종부와 연락을 취해주고 아울러 종부의 전화번호도 알려주었다.
 
광주에서 우반동으로 가는 길은, 호남고속도로를 지나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줄포IC를 통과하여 채석강 쪽으로 가다가 보면, 오른쪽에 부안김씨 우반동 종중 고문서라는 푯말이 보인다. 그곳에서 우회전하여 작은 마을길로 들어가면 울타리도 없고 담도 없는 종가집이 보이고 바로 왼쪽 야트막한 언덕에 고문서 유물 전시관인세덕각世德閣이 자리하고 있는데 단청이 아름답다.
 
부안김씨의 종중은 소박한 시골 가옥으로 종부와 그의 장남인 종손이 대를 이어서 지키고 있었다. 필자가 답사를 가는 날도 종부는 고추모를 이식하느라 부재 중 이었는데 전화를 받고 곧바로 오셔서 전시관을 소개해 주셨다.
 
▲세덕각
세덕각 뒤에는 대숲이 우거져 있고, 그 터에는 옛날 부안김씨 선조들이 살았던 가옥이 있었는데, 화재로 멸실되었다고 종부는 전한다. 세덕각의 대문을 지나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당에 가득한 풀들이 인적이 뜸함을 알려주고 있었고 이중으로 잠겨있는 열쇠를 열고 들어가니 고문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유물 전시관은 19881월에 고문서를 보호하기위해 문화재관리국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였다. 이 건물 제일 아래 오른쪽에 있는 머릿돌에 ‘1988. 1’이라는 숫자가 건립 연도를 대변해주고 있다. 이 유물 전시관에는 보물 900호로 일괄 지정된, 토지 및 가옥 매매문서, 분재기, 노비매매문서, 호적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종중고문서는 15세기 중엽에서 19세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작성된 것으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愚磻洞에 거주하고 있었던 고김종덕金鍾德 선생이 귀중하게 소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안김씨 종중 우반동 고문서는 보관상태가 상당히 양호하여 내용을 대부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 일어난 각종 소송문서들이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의 향촌사회의 흐름을 이해하고 일상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자료이다.
 
이 유물 전시관을 관람하고 나오니 종부가 그동안 집안에서 전해내려 온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셨는데, 그 중에집 뒷산에 독을 묻고 그 안에 고문서를 넣어서 지켰으며, 산에서는 쇠 냄새가 났다.”고 했다. 전란과 불의의 화재 때에도 고문서와 재산이 잘 보전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우반동 부안김씨 가문에서는 김명열金明說이 봉사奉祀와 분재分財의 원칙을 다시 세웠는데, 당시 사회에서 아들과 딸에게 재산을 분배하는 원칙을 따르지 않고, 그의 아들 김번金璠과 김문金璊에게 별급 형태로 노비와 재산을 나누어주고 세 명의 딸에게는 재산이나 노비를 전혀 나누어 주지 않았다. 아래에 소개한 고문서는 김번과 김문이 그의 아버지인 김명열로부터 당시의 관행을 깨고 특별히 분배받은 지 9년이 지난 후에 1678년에 두 형제가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며 작성한 문서이다.
 
아버지(김명렬)께서 우반동에 있는 전답과 노비를 우리 형제에게 문서로 작성하여 특별히 나누어 주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균등히 나누어 가진다. 평일 말씀 중에 이 전답과 노비는 딸에게는 절대로 나누어 주지 말고, 오로지 아들에게만 대대로 전하여 주라고 하셨으므로 나의 후손들도 역시 이로써 정식을 삼아 대대로 지켜 나가도록하라. 만일 이 지시를 어긴다면 누가 나에게 자손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각별히 거행하도록 하라.”
 
위의 고문서 내용을 보면, 사회의 관례나 원칙보다는 부모의 의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위와 같은 문서들은 집안 어른이 대대로 소중히 장기간 보존해왔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고문서는 현재 그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당시 사람들이 필요에 의하여 주고받은 내용이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사료적인 가치는 매우 높다.
 
호남 지역에 세거지가 있는 조선시대 양반가문 가운데 고문서를 보존하고 있는 가문이 상당히 많다. 형태상으로는 각 집안마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경우와 문중의 재실이나 사원에 보관하는 경우, 여러 박물관이나 국립중앙 도서관,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기탁하는 경우 등이 있다.
 
예를 들면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동길 89-4에 있는 모현관慕賢館에는 미암 유희춘 관련 선산유씨의 고문서가 다량 보관되어 있고, 전남 영암군 서호면 노정길 245-3에 있는 고반재考般齋에는 밀양김씨의 고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또 전남 해남군 연동리에 있는 녹우당綠雨堂에는 해남윤씨의 고문서가 보관되어있으며, 특히 전남대 도서관에 기탁되어 있는 담양 영일정씨의 계당고문서溪堂古文書는 총 3,000여종이 있는데, 이 중에는 지방문화재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호남 지역의 향토사연구와 생활사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고문서가 사료로 이용되려면 위에서 소개한 부안김씨 우반동 고문서처럼 연구자들에게 공개하고, 아울러 일련의 정리가 필요하다.
 
고문서는 특성상 단편적인 기록이라도 역사적인 사실을 증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경우가 있기 때문에 더욱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영일정씨 계당고문서는 상당히 많은 분량이 보관되어 있는데도 아직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전혀 볼 수가 없으니 아쉽다. 그리고 각 문중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들도 멸실되기 전에 연구자들에게 공개하고 활자화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면 우리 광주 지역에서도 고문서의 정리와 수집 등 연구가 시급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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