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의소리> 지역공동체캠페인,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
<시민의소리> 지역공동체캠페인,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
  • 박창배 수습기자
  • 승인 2016.05.1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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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로 일원 및 오지호 가옥에서 열려
“내가 사는 곳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시민의소리>가 주최하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후원하는 지역공동체캠페인 ‘길위에서 역사를 만나다’ 프로그램이 17일 지호로 일원 및 오지호 가옥에서 열렸다.

이날 캠페인에는 곽복률 국민의당 광주시당 사무처장, 기세자 지산2동 동장, 김미정 시민기자, 김영광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집행위원장, 김현영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서순복 조선대학교 법대 교수, 심상봉 전 광주건축사협회 회장, 이상걸 시민의소리 이사, 조선호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 홍인화 전 광주시의원(이상 가나다 순) 및 지산2동 주민 등 30여명이 참석했다.

▲ 단사공원에서 <시민의소리> 박용구 편집국장이 지호로로 명명된 배경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시민의소리>는 광주 시민들에게 새도로명을 알리자는 취지에서 광주지역 20개 도로를 선정해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도로명과 그 유래는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는 지역공동체캠페인 '함께 길을 걸어요'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그 결과 많은 시민들이 왜 이러한 도로명이 명명되었는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의 경우, 그 인물에 대한 이해가 많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시민의소리>는 올해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를 높이고, 이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길 위에서 역사를 만나다’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 캠페인 역시 이 프로젝트의 하나로 시민들과 함께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를 걸으면서, 왜 이러한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 인물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도로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등에 대해서 알아보고, 이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됐다.

그 첫 번째 순서가 지호로 및 오지호 가옥 탐방이다.

지호로는 옛 동명동 7-2번지에서 시작해서 옛 산수동 5-2번지에 끝나고, 그 길이는 2353m다. 2009년 11월 26일 고시됐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옛 제1순환도로에서 지산유원지로 가는 길이다.

이 지호로의 3분의 1지점 쯤인 지산2동 주민자치센터에서 집결한 일행들은 지호로를 따라 옛 단사동에서 유래한 단사공원까지 걸었다. 

이 행사를 주관한 <시민의소리> 박용구 편집국장은 단사공원의 평상에서 다리쉼을 하면서 “광주에 역사적 인물의 이름이나 호를 따서 명명한 도로가 30여개 이상 되는데, 이에 대한 시민들의 이해가 부족해 이 같은 캠페인을 진행하게 됐다"며 "이번 캠페인을 통해 왜 지호로인지, 지호로는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은 어떤지 등을 알아서 다른 시민들에게 널리 설명해줬으면 바란다"고 말을 꺼냈다.

이어 그는 "지호로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한국적 인상주의 화가로, 그리고 광주를 대표하는 현대 서양화가로 평가받고 있는 화순 동복 출신 오지호 화백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다"면서 "지호로는 조선시대 초 문인이었던 이선제(李先齊) 선생의 호 필문(畢門)을 따서 명명된 필문대로에서 지산유원지 가는 길 초입에서 시작해 무등산관광호텔과 신양파크호텔을 조금 지나 끝나는 2차로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호로 밑으로 동계천이 흐르고 있다. 예전에는 이 물로 딸기와 감을 많이 재배했고,  딸기는 전국적으로도 꽤 유명했다"고 덧붙인 뒤, "광주 인근 시민들이 즐겨찾는 유원지로 한때 많은 사람들이 화전놀이를 즐기러 다닌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현재 이곳에서 3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한 주민은 박용구 편집국장의 말을 거들면서 “예전에 동계천에서 멱도 감고, 화전놀이도 했었다”면서 옛날을 추억하기도 했다.

덧붙여 조선호  (사)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는 "지금이 5.18기념주간인데, 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이한열 열사의 생가도 바로 이 지호로에 있다"면서 "단사공원에서 바로 보이는 검은 지붕의 집이 열사의 생가이다"고 알려주었다. 앞으로 역사적 유산이 될 이한열 열사의 생가를 보존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사공원에서 잠시 땀을 씻어낸 일행들은 지호로를 가로질러 돌계단 아래로 내려와 오지호 가옥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박용구 국장은 “도로명 주소로 오지호 가옥은 처음 지호로가 아닌 밤실로로 되어 있었는데, 오지호 화백의 자부인 이상실 여사가 구청에 항의를 해서 지호로 지번 중에서 빠진 81-20, 21, 22번지를 얻게 되었다"며 "실제 오지호 화백이 산책을 하거나 시내 중심가로 나갈 때 다니던 길은 밤실로로 되어 있어, 이 길을 지호로로 재조정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시민의소리> 지역공동체 캠페인 ‘길위에서 역사를 만나다’에 참석한 시민들이 오지호 가옥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오지호 가옥의 이모저모에 대해서는 조선대학교 법대 서순복 교수가 설명을 했다.

초가지붕에 4칸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한국 남방형 집인 오지호 가옥은 현재 자부인 이상실 여사가 거주를 하고 있다. 평상시 개방을 하지 않지만 캠페인의 뜻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민들에게 이날 개방한 것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6호(1986년 9월 29일)인 이 가옥은 지산동의 옛 딸기밭 아래에 있는 초가집으로 원래는 조선대학교 사택이었다. 조선대학교 교수로서 이곳에 기거했던 오지호 화백이 이후 이를 구입해 1982년 타계하던 때까지 살던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화실로 사용되는 문간채가 있고, 안채는 초가집인데 정면 4칸, 측면 1칸의 전후퇴이며 초가 우진각지붕집이다.

이상실 여사는 "원래는 정면 3칸이었는데 1칸을 달아낸 것이다"고 설명했다. 평면은 1칸반의 부엌과 1칸씩의 방3개로 되어 있고, 배면에는 툇마루와 골방이 있다.

앞마당은 주인의 성품을 대변하듯 화단이 맥문동을 울타리 삼아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고, 뒷뜰 역시 장독대가 단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화실은 6평 남짓한 크기이며 북향에 채광창이 있고, 장마루와 맞배지붕을 한 유럽 스타일의 정통 화실이다.

북향에 채광창을 둔 이유에 대해 서순복 교수는 "오지호 화백은 한국의 인상파를 대표하는 화가다. 오 화백은 인물을 그릴 때 동, 서, 남쪽에 창이 있으면 시간에 따른 빛의 변화가 심해 정확한 표현에 방해가 되므로 빛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북쪽에 채광창을 두었다"면서 "오 화백은 대단한 과학적 사고의 소유자였다"고 설명했다.    

이번 캠페인에 참여한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내가 사는 곳에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옛 기억이 새록새록 나도록 잘 보존되어 있어 뜻깊은 탐방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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