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행사는 식전행사인 풍물놀이와 무용공연을 시작으로 개회사, 국민의례, 4·19혁명 경과보고, 기념사, 4·19의 노래 제창을 순으로 진행되었다.
김영용 호남4·19혁명 단체 총연합회 상임대표는 “4·19혁명은 1980년 3월 15일 자유당 이승만이 제4·5대 정·부통령 부정선거를 통해 영구집권을 꾀하려다 광주와 마산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이날 광주와 마산 3·15 시민봉기가 4·18 서울 고려대의 반공청년단에 의한 집단테러 유혈사태로 이어져 4·19일 전국적으로 불길이 치솟았다"며 "학생들이 중심이 된 국민 총궐기로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한 것이 4·19혁명이다. 세계 유일의 순수 학생 중심의 민권승리다. 4·19혁명으로 186명의 고귀한 넋이 민주 제단에 산화되었고 7천8백여 명이 부상했다"고 설명한 뒤, "3·15는 4·19의 원인이고 4·19는 3·15의 완결이다"고 강조했다.
호남 4·19 정의문(定意文)에는 "호남의 4·19는 광주금남로 3·15부정선거 첫 규탄 시위에 이어 그 동선(同線)에 촉발된 4·19혁명의 시원(始原)이었고 4·19혁명의 전국적 불길을 댕기게 했던 3대 첫 진원지로서 선봉적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광주학생독립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518민주화운동을 낳게 했던 한국 민주지형의 ‘토대’였고 ‘허리’다. 아직 못다 이룬 미완의 4·19를 이순신 장군의 약무호남(若無湖南) 시무국가(是無國家) 정신으로 통일을 이룩해 가는데 마지막 사명을 다 할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4·19혁명 기념행사에 학생들이 없어 안타까웠으나 다행히 국회의원 당선자들과 기초자치단체장들이 참석해 그날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이제 불의에 저항해서 민주를 쟁취한 학생중심의 4·19혁명정신과 광주정신이 민족의 가슴에 대하를 이뤄 민족통일로 이어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