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균형 감각으로 통합 추구한 민족해방운동가 장병준
탁월한 균형 감각으로 통합 추구한 민족해방운동가 장병준
  • 정선아 수습기자
  • 승인 2016.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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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병준 평전

민족해방운동가 장병준의 삶을 다룬 평전이 출간되었다. 일제 식민지 독립운동사에서는 그 이름이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장병준. 그는 1893년 무안군 장산도(지금은 신안군)의 신흥 지주 집안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뒤 일본 니혼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도중에 유학 생활을 포기하고 민족운동에 나섰다. 3·1운동을 맞아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고향 장산도로 내려가서 3.18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그 후 장병준은 서울에서 서북지역 출신 동지들과 함께 한성정부 수립을 위한 통합 국민대회 준비 과정에 잠시 참여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상하이 임시정부와 러시아령 대한국민의회 정부 통합을 촉구하는 의안을 발의했다. 동시에 의원직을 버린 그는 임시정부의 비밀 요원 자격으로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누비며 정부 통합 임무를 수행했다.

이듬해인 1920년, 3·1운동 1주년을 맞아 장병준은 국내에서 다시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전국적인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3·1만세운동의 재현을 촉구하는 경고문을 만들어 전국에 배포했다. 이른바 ‘3·1운동 1주년 기념 경고문 배포사건’이다. 하지만 거사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주모자 장병준은 경찰에 체포되어 악명 높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한편 출옥 후 장병준은 지역운동에 투신, 목포와 서남해안 지역의 민족운동가들을 규합하여 목포 신간회를 설립하고, 그 중심에서 활동했다. 이때에도 장병준은 민족운동 내부에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어름에서 좌우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비록 신간회는 3년 만에 해체되었지만, 탁월한 균형감각으로 좌우를 아우르는 장병준의 통합 정신은 이후에도 서남해안 지역 사회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임시정부 수립 초기 상황과 전남 서남해 지역 사회운동사 잘 반영

이 책은 여느 평전과 마찬가지로 장병준이라는 한 인물의 일대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껏 대중적으로 잘 조명되지 않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초기 민족운동 상황이 생생한 사료들을 근거로 잘 드러나 있다. 요컨대 3.1운동 직후에는 이른바 ‘전단정부’가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이러한 정부 수립 열망은 민족운동 세력들 사이에서 경쟁과 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사실 우리 근현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제강점기 하에서 민족운동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사불란하게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일제식민지에서 독립하자는 대의는 같았지만 실제로 전개된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은 독립전쟁론, 의열투쟁론, 외교방략론 따위로 다양한 노선의 스펙트럼을 형성하고 있었고, 이러한 노선 차이가 3.1운동 직후에 추진된 정부 수립 과정에서도 노출되었던 것이다. 평전에는 이처럼 일면 껄끄러운 역사의 이면까지도 담담히 드러나 있다. 평전의 저자가 흔히 대중적 역사 저술가들이 빠지기 쉬운 쇼비니즘의 함정에서 벗어나 객관적 관점으로 한 운동가의 삶을 비교적 냉정하게 조명하고 있는 까닭이다.

더불어 평전은 전남 서남해 지역의 일제강점기 사회운동사를 촘촘히 재현하고 있다. 특히 암태도 소작쟁의 지도자 서태석이나 완도 출신의 운동가 송내호 등 서남해 도서 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장병준의 교류 과정을 통하여, 당시 전남 서남해 지역 사회운동 네트워크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따라서 평전은 이제까지 일반인에게는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던 한 지역의 민족운동사를 재현하고 있다.

4.19혁명의 시원(始原)인 광주 3.15의거의 실상 밝혀내

해방 후 장병준은 정치 일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독재가 정점에 오르자 이에 분노한 장병준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 나섰다. 그 분노는 1960년 광주3·15 의거에서 표출되었다. ‘광주 3.15의거’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의 상상을 초월한 선거부정을 규탄한 시위를 말한다. 그날 낮 12시 45분. 민주당 참관인 70여 명을 포함한 당원 200여 명은 선거부정에 항의하며 장례식 차림을 하고 전국에서 최초로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67세의 장병준은 ‘곡(哭)민주주의 장송(葬送)’ 현수막을 직접 펼처 든 채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 모습은 광주 3·15의거를 전하는 외신 보도사진에 포착되었다. 장병준 평전의 표지에 나오는 바로 그 사진이다.

한국현대사는 4·19혁명이 마산 3·15부정선거 규탄시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반면 이보다 3시간 먼저 발생한 광주 3·15부정선거 규탄 유혈시위는 광주에서 최초로 일어났다. 장병준 평전에는 1960년 3월 16일자 「부산일보」 등 정확한 사료를 바탕으로 당시 광주 3·15부정선거 규탄시위가 마산 시위를 거쳐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는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에 대한 새로운 문제 제기인 셈이다.

집필 시작 10년 만에 결실, 현직 역사학자의 엄밀한 감수 거쳐

장병준 평전의 집필 작업은 지난 2005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료 발굴의 어려움 때문에 도중에 여러 차례 집필이 막혔다. 그러던 중 이기훈 연세대 교수 등 현직 역사학자로부터 관련 사료 발굴과 자료 해석의 도움을 받고, 엄밀한 감수를 거치는 등 끈질기고 치밀한 과정을 거친 끝에 올해 봄에야 작업이 마무리되어 출간을 맞게 되었다. 집필을 시작한 지 무려 10년만에야 그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한편, 장병준의 아우 장홍염은 1930년 서울 학생운동을 이끈 뒤 중국으로 건너가 아나키스트 활동을 벌였으며 제헌의원으로 활동했다. 덕분에 한 집안의 형제가 나란히 독립운동 유공자이다. 장병상, 장홍재 등 장병준의 다른 형제들도 한때 항일 활동에 참여했다. 게다가 이들 형제의 후손들은 현재 정·관·학계에서 눈에 띄는 활동을 벌여 세간의 관심을 받고 있다. 덕분에 신안군 장산도 인동 장씨 집안은 호남의 신흥 명문가로 잘 알려졌다. 장병준은 그 선망받는 집안의 맏할아버지이다. 따라서 장병준 평전을 통해 독자들은 공부 잘 하기로 소문난 신흥 명문가의 내밀하고 자잘한 이야기도 덤으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장병준 평전은 언어와 역사, 철학 등의 경계를 오가며 대중적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박남일 씨가 10년에 걸쳐 완성했다. 이 책의 출판기념회는 오는 19일 오후 7시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도서출판 선인에서 출간했으며, 정가는 23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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