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민족민주화대성회의 주역, 양강섭
80년 5월 민족민주화대성회의 주역, 양강섭
  • 전용호 소설가
  • 승인 2016.03.30 1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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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과 트라우마로 인한 지병으로 숨지다
▲ 故 양강섭 전 관현장학재단 상임이사

2016년 3월 28일, 63세의 양강섭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0센티의 키에 눈과 귀와 코가 커서 미남인 얼굴에 아랫입술이 두꺼워서 의지가 강하게 느껴지는 멋진 사나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잘생긴 그의 인상처럼 그렇게 멋있게 살지 못했다. 그는 40대 후반을 넘어서면서 오래전에 먼저 죽은 친구 박관현을 가슴에 지우지 못해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항쟁 당시 살인적인 구타와 고문으로 인해 얻은 허리와 척추의 통증도 재발했다. 생활에 집중할 수 없었고 잔병에 시달렸다. 죽기 십여년 전쯤 간경화가 시작되었고 3년 전부터는 암으로 변하여 온 몸에 퍼져나갔다. 그는 5월항쟁 고문 후유증과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원인이 된 지병으로 죽었다. 그는 5월항쟁의 희생자로 ‘부상(상이) 후 사망자’임이 분명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5월항쟁 희생자는 5천5백명을 넘어섰다. 518국립묘지에는 2016년 현재 740명이 묻혀있다. 80년 5월 27일까지 신원이 밝혀진 사망자가 155명,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가 11명, 행방불명자가 81명으로 총 247명이 죽거나 사라졌다. 80년 5월 27일 이후 부상(상이) 후 숨진 사람이 110명(중복 5명)이다. 부상(상이) 후 사망자는 항쟁기간인 5월 18일부터 27일 동안에 부상을 당한 후 악화되거나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을 말한다. 그 외에 부상자가 2,461명, 연행구금상이 1145명, 연행구금 1556명 등이다.

사랑하는 벗, 박관현과 함께 민주화의 횃불을 들고

양강섭, 영암 월출산의 정기를 받고 시골에서 영재 소리 들으며 자라 광주의 명문학교인 동중과 광고를 졸업하고 전남대에 입학했던 멋진 사나이. 그의 인생에서 빛났던 시간이 있었다면 언제였을까. 80년 봄, 그는 확신에 찬 신념과 우정의 벅찬 감동과 아련한 희망으로 행복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사랑하는 벗 박관현과 함께 민주화의 횃불을 높이 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4월, 민주화의 봄이 되자, 박관현이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였다. 그는 선거대책본부 사무장을 맡아 선거를 치러야 했다. 박관현은 64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지지로 회장에 당선되었다. 선거가 끝나자 그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아 박관현 총학생회의 내부적인 살림을 맡아 꾸려갔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출범하자마자 상대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을 지원하고 복적생이 제기한 어용교수 퇴진투쟁을 주도하였다. 5월 3일부터 ‘비상계엄해제’와 ‘전두환 등 신군부 퇴진’ 등을 요구하며 정치투쟁을 시작했다. 5월 14일 전남대 학생들이 가두로 뛰쳐나오면서 시작된 시위가 15일부터는 광주지역 대학생 연합시위로 확산되어 16일까지 계속되었다. 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 연단을 만들어 ‘민족민주화대성회’라 명명한 3일간의 시위는 대통령 직선을 촉구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요구하였다. 5월 16일, 민주민주화대성회는 양강섭의 사회로 전남대, 조선대, 광주교육대, 조선대공전, 동신실업전문, 송원전문, 성인경상전문, 기독병원 간호전문, 서강전문대 등 광주 시내 9개 대학 3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오후 3시부터 시국성토대회를 시작으로 저녁 8시에는 야간 횃불 시가행진을 벌였다.

5월항쟁에 참여하지 못한 트라우마

18일 0시를 기하여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단의 체포가 시작되었다. 5월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항쟁이 그렇게 확산되리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항쟁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은 전남대 총학생회장을 기다렸다. 그러나 박관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박관현 회장, 양강섭 총무부장과 집행부는 여수 돌산으로 피신하였다. 항쟁기간 도중 박관현은 광주로 진입하려고 시도했으나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실패하였다. 5월 27일, 항쟁이 끝나자 그들은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박관현은 서울로, 양강섭은 영암 집으로 도피했다. 양강섭은 집 마루 밑에 굴을 파서 그곳에 은신했다. 그로부터 한달만인 6월 30일, 그를 검거하기 위해 불시에 집에 온 형사들에게 체포되어 상무대 계엄사 합동수사단에 인계되었다.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단은 김대중과 광주항쟁을 연결시키기 위해 김대중이 시위자금으로 정동년에게 500만원을 주고, 정동년이 박관현에게 300만원을 준 것으로 날조해놓은 상태였다. 박관현이 검거되지 않아 더 이상 수사진전이 없을 때 양강섭이 체포되었다. 그는 그날부터 그들이 날조한 내용대로 진술할 때까지 몇날며칠동안 밤잠도 자지 못하고 천정에 매달은 밧줄에 손을 묶여 눈을 가리운 채 허리띠와 몽둥이로 두들겨 맞았다. 그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 되고 말았다. 전신이 퍼렇게 멍들고 허리와 척추가 망가져서 서서 오줌도 눌 수가 없어 개처럼 엎드려 소변을 봐야 했다. 그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2심에서 5년으로 감형이 되고 대법원에서 1981년 4월 3일 형 집행면제로 석방되었다.

1982년 10월, 서울에서 신분을 숨기고 공장에 다니다 체포된 박관현은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하다 쓰러져 끝내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박관현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감시를 피해 영광으로 갔으나 보지 못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지인 박관현의 마지막 임종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그의 가슴에 영원히 한으로 맺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1954년 8월 30일, 양강섭은 전남 영암군 도포면 수산리 선불에서 평범한 농사꾼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68년 영암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동중에 입학하여 운명적인 친구 박관현과 만났다. 둘은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둘 다 반장을 맡아 친하게 지냈다. 1974년 광주고를 졸업하고 1975년 전남대 문리대에 입학하고, 그해에 입대하였다.

1978년 대학에 복학하여 박관현과 재회하고 정용화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민족과 역사에 관심을 갖고 1학년 중심으로 10여 명을 모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전환시대의 논리’ 등 사회과학 서적들을 구해 산장이나 증심사 등 밖으로 돌아다니면서 학습을 했다. 1978년 6월 29일 민주교육지표선언 시위사건이 발생하여 양강섭은 무기정학을 당하고 정용화는 구속되었다. 박관현은 들불야학의 강학으로 활동하느라 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다.

1984년 복적이 되어 1986년 대학을 졸업했다. 1985년, 당시 재야민주화운동단체인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 총무간사로 윤강옥, 위성삼 등과 함께 전민협을 결성했다. 1986년 5월 18일, 민주쟁취 국민운동 전남본부를 결성해 사무부처장 겸 총무국장을 맡아 활동했다. 1988년 8월 18일, 고 박관현 열사 기념사업회를 발족해 회장을 맡아 영광에 있던 박관현의 시신을 11월 13일 광주 망월동 민주묘역으로 이장하였다. 1988년~1995년, 고향인 영암의 유인학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활동하고, 1995년~1998년까지 전남도의회 의원을 역임하였다. 이후 5.18기념재단 이사와 (재)관현장학재단을 창립하고 상임이사를 역임하였다. 최근까지 광주·전남 민주화운동 동지회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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