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와 화해
복수와 화해
  • 김병욱 충남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16.03.2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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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욱 충남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문순태는 광주의 토박이 작가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중․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나왔고 대학(조선대)마저 광주에서 나왔으며 대부분의 직장 생활도 광주에서 했다. 그런데 그를 생각하면 무등산이 아니라 지리산이 떠오른다. 그의 중편소설 ‘철쭉제’의 주요 배경이 지리산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중편소설을 우리나라 중편소설의 3대 수작이라 생각한다. 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장편소설로 스케일을 키웠으면 하는 점이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아마 1981년 ‘한국문학’ 8월호일 것이다. 그 후 1983년에 창작집 ‘피울음’에 수록된 것을 읽었고, 대학에서 소설론 강의할 때 읽었고, 내 박사학위 논문 「한국 현대소설의 시간과 공간 연구」에서도 크로노토프(chronotope․시공간)를 적절히 배합된 예로 이 작품을 분석했다.

나는 크로노토프를 설명하면서 바둑의 수를 들어 설명했는데 일부 노문학자들에겐 적절한 비유라고 회자되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또한 새의 둥지라는 공간에 알을 낳고 부화하는 것도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 형식뿐만 아니라 이 소설은 주제가 형식에 걸맞게 잘 조화가 되었다. 복수의 일념으로 30년을 살아온 검사인 주인공은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라 추정하는 박판돌을 앞세워 지리산 종주 코스인 노고단, 반야봉, 연하천, 세석평전을 향해 등반 아닌 등반을 한다, 그리고 세석평전 철쭉나무 밑에 묻혀 있는 유골을 발견한다. 그러고 나서 박판돌은 사라진다. 만약 이 소설이 이 아버지의 유골을 찾는 데서 끝맺어졌다면 이 소설은 평범한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클라이맥스에서 대반전이 이뤄진다. 천왕봉 에피소드에서 사라졌던 박판돌은 다시 나타나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의 할아버지가 판돌이 어머니를 범하는 현장을 목격한 판돌이 아버지 박쇠의 피부림과 박쇠처의 팔이 잘리는 부상, 그 후로 사냥을 핑계로 나의 아버지가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박쇠를 죽여 유기한 것이다. 6․25 때 판돌은 나의 아버지를 묶어 끌고 가 자신의 아버지의 유해를 찾으려다 뜻밖에 자기가 박쇠를 죽였다는 자백을 듣고 판돌이는 나의 아버지를 살해한 것이다. 이 기막힌 사연을 들은 나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왜 판돌이가 자기의 아버지를 살해한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 대를 이은 복수의 복수극은 나 자신으로 끝내야겠다는 심경의 변화와 자괴감이 지리산 정상에서 어둠과 함께 짙게 깔리게 된다.

이 소설은 6일 간의 이야기 시간 속에 60년의 이야기된 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동일한 지리산이라는 공간에 그 60년의 시간대가 적절히 교차하면서 소설의 크로노토프를 형상화한다. 문순태는 2012년에 전 9권으로 완결판을 낸 ‘타오르는 강’에서 영산강변의 어느 마을을 두고 3대에 걸친 이야기로 대하 장편소설을 완성했는데 이 소설도 공간과 시간의 크로노토프가 잘 어울린 작품이다.

또한 ‘철쭉제’는 웅장한 지리산 종주 동반 코스를 따라 작중인물들의 심리묘사, 그리고 자연 배경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나는 항상 훌륭한 작가는 묘사력이 뛰어나다고 말하곤 하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 이 점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날은 대단원이다. 지리산에 자욱한 안개가 걷히듯 나의 마음 속에 가득했던 복수의 일념도 말끔히 걷히게 되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이 소설의 주제는 “판돌씨 내년 철쭉제 때 다시 만납시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아버지 대신 제가 사과하지요”라는 말에 다 녹아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 정권의 서슬이 멀금한 때 발표되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6․25 때 10세의 어린 소년이 30여 년이 흘러 좌우익의 용서와 화해의 주제를 이처럼 아름답게 보여 주었다는 데 가슴 뭉클하다. 우리의 정치 현실은 화해와 용서를 빌지 않는다. 이렇게 꽉 막힌 현실을 보면서 소설이 대설(역사)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훌륭한 소설은 우리를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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